백수,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깡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by Stella

2023년 11월 1일 남편의 직장으로 인해 얼떨결에 영국으로 이민이라는 걸 했고,

그렇게 나는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다.


한국에서 나는 사회생활 햇수로는 10년이라는 시간을 딱 찍었고,

직업적으로는 어릴 적 나의 꿈은 아니었지만 나름 안정적인 직업에다가

고액 연봉자에 속했기 때문에 이전보다는 훨씬 돈 걱정을 덜 했고 나름 소소하게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들을 살 수 있었다. 물론, 시간이라는 여유는 없었지만.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려오다 보니, 한순간 한국에서의 생활을 잠시 접고

남편 따라 낯선 나라에서 젊을 때 한번 살아보는 것도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똑같은 다람쥐 췟바퀴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핑계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라는 안일한 생각에 무턱대고 '이민'이라는 큰 결정을 했다.


남편도 나도 어릴 때 유학을 한 경험이 있는지라, 영어권 나라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은 없었고

글로 사랑을 배운 것처럼 유학이라는 경험으로 이민을 바라봤기에 마냥 드라마틱하고 우리가 좋아했던 향수에, 추억에 젖어 그 미화된 과거의 공간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대단한 착각을 하고 영국 땅을 밟은 지가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


유학과 이민의 차이 점을 나열하자면 수도 없이 많지만,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연재 이야기를 통해서 살포시 꺼내 볼 생각이다.


그렇게 나는 지금 8개월째 백수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이게, 참...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여기서 다시 직장을 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현실을 생각보다

쉽지 않고 내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의 나라에서는 더더욱.


처음 한 두 달은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백수생활이 나의 천직인 것처럼 여유롭게 늦잠을 자보기도 하고 운동 가고 싶을 때 운동도 가고 먹고 싶을 때 끼니를 해결해보기도 했다.

나처럼 매일 일하고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하루 이틀은 위와 같은 생활에 신이 나고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딱 한 달만 지나면 슬슬 죄책감 아닌 죄책감 같은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과연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지배되어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자괴감에 금세 사로 잡히게 된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국에서 고액 연봉자에 속했던 나는 남편 보다 벌이가 많았고 나도 모르게 그로 인해서 남편 눈치 안 보고 내가 하고 싶던 일들, 사고 싶던 것들은 샀고 맞벌이라는 이유 아래 나는 당당하고 경제력 있는 와이프라는 생각을 의연 중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왠 걸? 물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고, 영국 경제가 하루하루 어려워지다 보니 파운드는 올라가고

악 순환이 반복되면서 벌이가 없어진 나는 남편이 벌어 오는 월급으로 생활을 해야 했고 한국에서는 자가가 있었기에 따로 걱정은 안 했지만 여기는 렌트비만 한 달에 300만 원을 웃돌고 있기에 월급의 반 정도가 렌트비로 날아가가 보니 말이 생활 비지 사실상 생활이 되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목돈이 들어갈 일이 생기면 그 달의 생활비는 없어지는 거니까.

돈이 궁할 때 왜 이리도 쓸데없이 목돈이 들어가는 일이 많은지... 어쩌면 그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돈에 쫓기지 않다 보니 목돈이라고, 쓸데없이 들어간다고 생각지 들지 않았을지도.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이 벌어 온 돈으로 생활을 시작했고 그리 많지 않은 돈으로 2인 가구가 먹고살기에 너무 빠듯 해, 영국으로 이민 오기 전 생각 했던 것보다 적지 않게 당혹스러웠다.


그렇다고 남편 회사가 안 좋은 회사도 아니고 영국에서 나름 최고 기업에 속한다고 하는데 월급이 작다고 타박하기에는 내가 현재 백수이며 나는 돈 한 푼 벌어오지 않는데 당신 벌이가 작다고 탓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돈을 안 쓰려고 최대한 노력은 하지만 하루에 커피 한잔, 움직이는 주차비, 주유비 등등 사소하게 들어가야 하는 필수적인 것들도 이제는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고, 남편도 절대 눈치 주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의연 중에 ''오늘 굳이 ~를 사려고?? 필요 없을 것 같은데...''라고 남편은 별 뜻 없이 말하고 지나간 것이 나에게는 비수처럼 다가오고 내가 돈을 벌고 있지 않아서 무시하는 건 가라 라는 자격지심 마저 생기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은 지금은 심사숙고해서 구매를 결정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들도 여기서는 '비싸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로 인해서 오는 스트레스는 점점 심해졌고 '내가 이러려고 한국에서 머나먼 땅 영국으로 이민 왔나' 싶기도 하고 가끔은 그 여유로운 생활을 뒤로하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온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드는 생각은 백수도 나름의 깡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죄책감, 자책감을 매일 버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일을 할 때 백수를 보면 '노는 사람' '할 일 없이 밥만 축내는 사람'이라고 한심하게만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역시, 역지사지(易地思之)인가 내가 백수가 되어보니 백수라는 이름표 뒤에 보이지 않았던 그들의 절박함, 죄책감, 우울감, 자존감, 누구보다 열정을 숨기고 있는 모든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몰래 예전에 내가 한심하다고 욕했던 '그들'에게 사과를 해보기도 한다.


남편의 돈을 맘 편히 받아가며 생활할 수 있는 깡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는 나는 오늘도 다람쥐 쳇바퀴를 돌리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 중이다.

얼른 나에게도 '쳇바퀴'가 생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백수,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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