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단지 답사기

광주대단지 프로젝트 2

by 김재현

기억을 맴도는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작은 집들이 좁은 골목길 하나를 두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었다. 어릴 때 읽던 책에 실려있던 삽화는데, 다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풍경만큼은 너무나 기이하고 충격적이었기에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나중이 되어서야 그곳이 성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젠가 거기에 가봐야겠다. 내가 살던 동네들이 하나둘 재개발되는 모습들을 보다가, 문득 성남이 떠올랐다. 혹시 그곳은 아직 남아있을까.


그래서 이곳에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기록을 남기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릴 때 봤던 책 속의 사진과 같은 장면을 아직 찾을 수 있었다. 요즘사람들은 이 풍경을 '성남 인셉션'이라고 부른다.


현재 성남 태평동의 풍경


도시소개

이곳은 성남의 수정구 일대로, 현재는 성남의 원도심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흔히 볼 수 있는 한국 저층주거지의 풍경이기도 하지만,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들이 있다. 작은 필지들이 그리드를 정확하게 맞추고 늘어서 있는 것, 그곳에 지어진 건물들이 이격거리가 없다시피 할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다는 점이었다.


이곳은 지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상당한 경사지였음에도, 길과 필지들이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정확한 사이즈와 직선을 이루고 펼쳐져있다. 그래서 언덕 위에 만들어진 창신동이나 한남동 같은 다른 동네들과 그 풍경이 사뭇 다르다.


생활권의 메인도로인 수정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오르막이 시작되고, 경사지의 위쪽으로 작은 다가구주택들이 위치해 있는 상황이다. 그곳엔 좁은 이면도로를 중심으로 12~14채 정도의 주택들이 등을 맞대고 동, 서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집들은 옆집과 너무나 가까이 붙어있는 나머지, 창문을 열었을 때에는 옆집의 외벽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이런 열악한 주거지가 1km가 넘게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성남의 원도심인 태평동, 수진동, 신흥동일대는 이런 20평형의 작은 필지들로 이루어진 무수한 주택들이 모여 거대한 군집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이곳에 갈 때마다 마치 미로 속에 들어간 것처럼 압도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수정구 일대와, 북쪽의 태평동의 집들을 표현한 그림


역사

현재는 성남의 원도심, 혹은 여러 행정동으로 불리지만 조성되던 당시는 '광주대단지'라고 불리던 곳이다. 당시 이곳이 경기도 광주군에 해당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광주(廣州), 대단지(大團地)라는 이름이 이곳의 특성과 역사를 잘 담고 있는 표현으로 느껴진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곳이 만들어지던 방식이 한국의 도시개발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성남시에 위치해 있지만,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주택밀집지역들과 생성과정이 다르지 않았고, 그 규모나 열악함 면에서 오히려 서울의 도시개발의 어두운 면을 대표하는 지역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967

때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의 인구가 증가하고 과밀화되던 시점이었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서울 외곽에 대규모 이주단지를 조성해 도심 무허가주택 거주민들을 이주시킨다는 정책을 발표한다.


당시에는 서울시 전체가구의 39.7%가 무허가 건물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부는 이들을 강제이주시키거나, 외곽에 새로이 생기는 택지를 싼 값에 불하하겠다는 공약으로 서울의 구도심을 개발해 나갔다. 현재의 성남시뿐만 아니라, 서울의 도봉, 상계, 쌍문, 미아, 신정, 구로, 신림, 봉천동 등 수없이 많은 지역이 이렇게 철거민들의 집단 이주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철거민 정착지가 정상적인 택지들보다 더 많은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1968

이듬해 김현옥 서울시장은 서울도심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고, 당시 경기도 광주군에 빈민들의 정착촌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건설부의 승인을 받는다. 이에 맞춰 서울시는 철거민들에게 광주대단지가 신도시로서 경공업시설을 갖춰 자체적으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 복지, 문화시설등을 갖추어 도시로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겠다 약속했다.


이 때문에 철거민들 외에도 싼값에 주택을 마련하기 위해 이주하거나, 투기의 목적으로 이곳에 이주를 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실정은 선입주, 후 개발방식으로 기반시설 없이 단순히 주민들을 이주시킨 무책임한 도시계획이었다. 광주대단지는 정부의 계획과 달리 일자리와 복지시설이 없었고, 기본적인 상하수도조차 없었다. 심지어 철거민들에게는 군용 텐트만이 주어졌다.


1971

정부는 기존의 발표와는 달리 분양가격을 일방적으로 인상했다. 결국 광주대단지의 주민들은 이런 정부의 무책임한 행정에 항거하여 시위와 폭동을 일으킨다. 광주대단지일대에서 주민들의 궐기대회가 열렸고, 흥분한 주민들은 관공서에 방화를 하는 등 도시를 점거했다. 결과적으로 서울시는 사태 해결을 위해 주민과의 협상을 하였고, 이후 철거민의 이주를 중지, 자금지원과 공장건설, 세금면제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1973

광주대단지사건 이후 1973년 서울시나 당시 경기도 광주군과는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현재의 성남시가 만들어졌다. 광주대단지사건 이후 문제를 깨닫고 정부에서 별도의 행정구역을 만들어 예산편성과 관리를 시작한 것이다.


현재

이후 계속된 서울의 팽창과 함께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성남시 또한 확장과 성장을 거듭해 나갔다. 1980년대 이후 주거의 수요가 커지자 대부분의 주택들이 다세대/다가구화 되었고, 현재까지도 이 주택들은 초기 광주대단지의 20평형의 필지 규모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 매우 밀집된 주거지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2024년 현재 광주대단지 지역의 일부는 재개발이 확정된 상황이고, 대부분의 구역들이 재개발이 논의되고 있다.


사진-서울시 아카이브

도심지 정비사업과 이로 인한 철거민 이주정책, 그리고 열악한 주거지개발. 이것이 당시 도시계획의 레퍼토리였다. 앞서 말한 도봉, 상계, 쌍문, 미아, 신정, 구로, 신림, 봉천동등 서울의 수많은 주거지들이 이 당시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제대로 된 도시계획 없이 만들어졌기에 이 지역들을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재개발'이라는 현수막이 붙는 낙후된 지역이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도심을 정비한다는 이유로 그보다 훨씬 많은 지역을 골칫거리로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런 역사를 돌이켜보면 광주대단지는 지난 시기 한국의 도시개발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역이라 할 수 있겠다.


광주대단지의 주거지

지역의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모두 동시에 지어진 듯 비슷한 크기와 형식의 물들이 인상적이다. 각각의 주택들은 대략 6.5 mx8.5 m 정도의 필지 안에 지어져 40m²(12평) 정도의 아주 작은 건축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집들은 서로 등을 가깝게 맞댄 채, 서로 동쪽,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차량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길에 접하고 있는 집들도 많고, 일부 골목들은 주민들이 길을 막고 주차공간으로 쓰고 있는 곳도 있었다.


계획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량통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조금이라도 넓은 길 옆에는 편의점, 세탁소, 미용실, 교회등 있었다. 이곳 나름의 근린시설들이 위치한 가로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언덕길의 경사에 맞게 배치한 건물들의 입면사진
태평동 일대의 골목 풍경


주거공간

다가구주택에 해당하는 주택들이다. 좁은 땅에 지어진 건물들이기에 층마다 한 세대씩 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각각의 세대들은 건물마다 있는 외부계단을 통해 현관으로 들어간다.


필지자체가 워낙 좁으면서도 공용공간인 외부계단이 있어야 했기에, 많은 집들은 하나의 방 혹은 거실만이 도로를 면하게 되어있었다. 아파트로 따지면 1베이(1bay)에 해당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고, 조금 큰 집이라 하더라도 2베이정도였다.


그래서 많은 집들은 이렇게 도로를 면하는 방을 안방으로 사용하고, 그 안쪽으로 거실을 배치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여러 방식들이 있었지만 다수를 차지하는 형식을 분류하면 대략 이런 식이었다.


1. LDK가 도로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안방이 도로에 면한 구조 (LDK+방2개)

2. 도로 쪽에 1개의 방과 폭이 작은 주방이 면하는 방식 (LDK+방3개)


1. 일반적인 타입의 평면 2. 폭이 조금 넓은 타입의 평면


이 광대한 주거단지 중에서 태평동일대의 하나의 블록을 기준으로 삼고 도면과 이미지로 표현했다.


(좌) 집들의 방을 보여주는 평면. 개인공간은 어둡게 표현했다. / (우) 외부공간을 나타낸 그림


이 집들에 대한 내부도면은 구할 수가 없었기에, 여러 부동산 사이트들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서 평면을 재구성해야 했다. 공개된 배치도와 내가 실측한 치수들, 그리고 내부사진들을 맞춰보는 식으로 이곳의 표준 평면을 그렸다.


사진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있고 하나같이 정리가 안되어있는 모습들이 찍혀있었다. 좁은 집이다 보니 원룸처럼 거실과 주방, 식당(LDK)의 공간구분이 거의 없었고, 갈 곳 없는 물건들은 모두 다 그곳에 여져있는 것이었다.


기준으로 정한 대지의 일반적인 주택 형태와 공간구조를 나타낸 그림


주택 형식

이곳에 남아있는 집들은 90년 전후에 지어진 이른바 집장사집이었다. 벽돌이나 시멘트블록을 쌓아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콘크리트 슬라브를 올리는 연와조+슬라브 형식의 주택들이다. 서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저층주거지의 흔한 주택양식이다.



연와조구조를 표현한 그림과 단면도


1990년 전후로 지어진 이 집들은, 마치 요즘 지어지는 아파트들이 하나같이 비슷해 보이는 것처럼 모든 집들이 서로 공유하는 양식 같은 것이 있었다. 이것은 광주대단지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당시 지어진 한국의 모든 집들이 공유하는 형식이라 할 수 있겠다.


1. 형태

필지와 접도조건이 비슷하고 구조가 동일하기에, 집들은 매스부터 거의 동일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반지하세대가 있는 저층 부분은 콘크리트에 미장마감으로 일종의 기단부를 만들었다. 지층의 토압과 습기에 대응하기 위한 디자인으로 보인다. 또 이곳 집들의 지붕은 거의 평슬라브 형식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슬라브 혹은 테두리보가 조금 돌출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는 방수(물끊기)를 고려한 형태가 아닐까 싶다.


옥상의 파라펫 부분과 외부계단을 보면 항상 콘크리트 슬라브 위에 벽돌마감이 올라가고, 그 위에 또 콘크리트 두겁같은 것이 올라가, 일종의 띠가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아마도 별도의 금속이나 석재 두겁을 쓰기보다는 콘크리트로 간단하게 두겁을 만드는 당시의 방식인 것 같다.


돌출창 (베이윈도) 또한 많은 집들에서 볼 수 있는 형식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바깥쪽의 유리와 안쪽의 유리가 있어 이중창의 역할을 하고, 마치 발코니의 작은 버전처럼 실내외의 완충공간 역할을 한다. 동네를 보다 보면 이 창들의 형태가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것도 재미있는 구경거리다.


이곳의 집들을 표현한 그림.

2. 재료

거의 동일한 시대에 집장사들에 의해 지어졌기에 이 집들은 재료의 측면에서도 거의 비슷했다. 다수는 적벽돌을 사용하고 있었고, 벽돌모양의 타일이나, 밝은 색의 세라믹 타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보통 1층에 가게가 있는 경우에 밝은 색의 타일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집은 벽돌이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걸까.


벽돌이 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자세한 벽돌의 종류나 쌓기방식은 집집마다 조금씩 달랐다.


3. 설치물

이 외에도 당시 지어진 한국의 집들이 공유하고 있는 각종 설치물들을 이곳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석재난간, 철재 대문, 샷시, 목재천장마감 등 등.

요소들의 형식은 공유하지만, 각각의 집들이 조금씩 다르다.



자생적 공간과 건축

무책임한 도시계획과 그 위에 지어진 싸구려 주택들은 역시나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각자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자하는 모습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방수와 단열 같은 건물의 기본적인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씨름은 물론, 부족한 공간을 어떻게든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샷시와 옥탑 - 사람들은 이른바 샷시와 샌드위치패널을 이용해 놀라운 공간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단순히 평지붕 위에 옥탑방하나를 올리는 정도부터 건물곳곳의 남은 공간을 알뜰하게 써먹는 창의적인 방식까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공간들을 증축시켜 사용하고 있었다. 옥상은 그나마 빛이 잘 들고 바람이 통하는 위치였기에 집들의 부족한 외부공간을 대신하고 있었다.


샷시와 옥탑, 옥상공간


근린생활시설 - 별도의 상업가로가 있기는 하지만 이 언덕길을 매번 걸어 다닐 수는 없는 법. 이 주택건물들을 활용해 여러 생활편의 시설들이 생겨났다. 구멍가게, 편의점, 세탁소, 부동산, 미용실, 음식점, 교회등. 건물들의 규모가 워낙 작기에 하나의 편의점이 두 개의 건물에 걸쳐서 공간을 나눠 쓰고 있는 독특한 광경도 있었다.

편의점이 건물 한층으로는 모자라서 건너편 건물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근린생활시설들이 있는 가로가 형성된곳. 그리고 교회
동네가 낡아서인지 집수리관련 업체들이 굉장히 많다.


공원 - 간혹 가다가 집 한 채의 필지가 무슨 이유로 빈 땅이 되어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 대부분은 주차장으로 사용을 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차가 두세 대밖에 들어가지 않지만. 그리고 이런 공터 중 일부는 주민들의 작은 공원으로 만들어 이용하고 있었다.


골목 - 집들 사이의 골목이 워낙 좁은 탓에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에는 주민들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일종의 공동의 마당처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집들이 공동현관의 철문을 열어두고 생활하고, 특히 여름에는 낮에 각각의 세대 현관문까지 열어놓는 경우도 많은데 주민들은 이 좁은 골목들을 꽤나 안전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주차장과 공원으로 사용되는 공터의 모습. 주민들의 외부공간으로 활용되는 골목


덧붙인 지붕과 렉산처마 - 우레탄방수 특유의 짧은 수명으로 인해 지붕의 누수문제에 시달리는 집들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외부계단들이 천장 없이 노출되어있다 보니 비가 많이 올 때 계단을 타고 빗물이 실내로 유입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집들은 일부분을 렉산등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기도 하고, 아예 지붕 샌드위치패널로 박공지붕을 만들어 얹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참에 태양열, 태양광패널을 올리기도 하고, 창문 부분에는 청록색의 렉산으로 된 처마를 달아놓기도 한다.


집들의 덧붙인 지붕들


외장재 보수 - 치장벽돌로 급하게 만든 건물이다 보니 벽면의 누수등의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외벽 전체에 페인트를 칠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었다. 건물의 외벽면이 적벽돌이든 타일이든 냅다 페인트를 칠해버리는 것이다. 생각하기로는 이게 큰 도움이 될까 싶다. 그리고 외벽의 방수나 단열의 보강을 위해서 아예 외장재를 덧붙이는 경우도 많았다. 때문에 하나의 건물이지만 한쪽 면은 적벽돌, 다른 쪽은 타일등 이런 식으로 다른 종류의 마감이 붙어있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외벽의 타일이 떨어지는 게 고민이던 한 집은 아예 외벽에 그물을 쳐서 사람이 타일에 맞지 않게 했다. 어떤 건물은 타일이 한 번도 떨어지지 않는데, 어떤 건물은 계속해서 떨어지는 원인은 뭘까.


벽마다 다른종류 마감재를 덧붙인 집들
떨어지는 타일을 막기 위해 그물망을 설치한 집
이곳 사람들이 만든 공간들


도시개발사와 재개발

사람들이 만드는 다양한 풍경들은 도시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곳에 결핍된 것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건물들은 잘못된 도시계획이 만든 문제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곳의 주거환경이 좋지 못한 것은 싸구려 주택들의 태생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에는 도시계획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도시의 문제를 건축이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 과정의 비효율성을 생각하면 한국의 지난 도시개발사를 좋게 평가하기 어렵다.


옳게 된 계획이라면 상업가로를 계획하는 것이 백화점을 짓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하고, 근린공원을 계획하는 일이 아파트 단지를 공원화하는 일보다 앞서야 한다. 과거에 잘못 채워진 첫 단추가 지금까지 이 도시의 고질병을 만들고 있다.


대규모의 재개발 방식이 언제나 문제라고 생각해 왔지만, 어쩌면 이것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슬럼화될 수밖에 없는 도시구조는 현재와 같은 대규모 재개발을 부는 것이다. 제대로 된 도로와 주거환경, 인프라가 보장된 도시라면 지금처럼 대규모 개발을 복해야 했을까.


프로젝트의 출발점
처음 이곳에 가게 된 계기처럼, 나는 이 흥미로운 도시가 사라질 것이 아쉬웠다. 물론 여행자의 관점인 것이지만. 하지만 이곳의 환경을 구석구석 살펴본 이상 도시를 보존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무책임한 말임을 깨달았다.

저층주거지가 아파트와 대비되는 다양성의 공간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이었다. 바람이 통하지도 햇빛이 들지도 않는 환경 속에 살거나,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유리에 시트지를 붙이거나, 도둑이 들 걱정에 유리창에 쇠창살을 달아보지도 않은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만약에, 이 도시를 재사용해야 한다면 어떨까. 어떤 이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그 상상을 해보고 싶었다. 이 도시에 문제들이 많은 만큼 매력적인 부분들이 많았기에 가상의 프로젝트로나마 이 공간의 가능성을 조금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학생 때 이곳 광주대단지를 주제로 프로젝트를 해보고자 했다. 다음 글에서 그 내용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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