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단지 프로젝트 1
건축을 배우고 여행을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일상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공부하는 건물들 그리고 여행에서 만나는 도시들은 내가 시간을 보내는 공간들과 너무나 달랐다.
수업을 듣고 집에 오는 길에는 건물이 아니라 전봇대와 학원간판, 에어컨 실외기가 보였다. 나는 벽돌무늬 시트지를 붙인 집, 샌드위치 패널로 어설프게 증축한 집 사이를 걸어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학교에서 말하는 좋은 설계를 하려면 차라리 눈을 감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이처럼 나의 생활환경에서 디자인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도시의 99%의 공간이 디자인 없이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교수들이 말하는 디자인이라는 것은 오직 그 작은 1%에만 해당하는 예외적인 사례였을까.
지역주의 건축
한편 이때쯤 나는 지역주의 건축가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페터 춤토어나 알바 알토, 글렌 머컷 같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무엇이 지역주의 건축인지는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들의 건축은 그들이 살아온 지역과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건축은 굉장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신기하게도 그곳에 갔을 때는 가장 깊은 공감을 준다. 예를 들자면, 스위스 팔스Vals에 가서 그곳의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페터 줌토어가 목욕탕을 지으면서 왜 그 돌에 집착했는지, 그런 형태로 건물을 지었는지가 납득이 된다. 또한 북유럽의 문화를 접하고 소도시들을 다니게 되면 알바알토가 성당이나 도서관을 그렇게 디자인한 것이 한 사람의 고집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건축가 개인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그들이 살아온 지역에 기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편 우리는 어떤 건물을 만들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주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세계 어디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건축만을 추구해 온 것이 아닐까.
나는 서울에서 자랐다. 아파트단지와 골목길을 돌아다녔고 못생긴 간판과 실외기들을 보며 자랐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분명히 내가 느꼈던 것들이 있고 이야기할 만한 것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대체 뭘까.
한국의 저층주거지에 대해 공부하고 이에 대한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평소 일상 속에서 생각했던 것들을 최대한 많이 담아보고 싶었다. 아이디어 중심으로 진행되고 결과물을 위한 프로젝트로 느껴지던 학생설계의 레퍼토리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저층주거지
한국의 도시주택은 크게 아파트와 저층주거지로 나눌 수 있다. 저층주거지의 주택들은 흔히 '집장사집', '구옥', '다세대주택', '연립주택', '빌라'등으로 불리는 저층의 주택들이다. 나는 이 중에서도 8,90년대에 대충 지어져 현재는 노후화되고 있는 집들에 대해 다루고 싶었다.
아파트가 아닌 저층주거에 대해 다루고자 했던 이유는, 이 주택들이 시대성과 장소성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이라는 지역의 경제성장기. 그 시간과 공간을 대표하는 주거형식이다. 전쟁이후 약 반세기동안 이 도시를 채우던 이 주택들에 대해 주목해보자.
한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적벽돌의 집장사집들은 생각해 보면 신기한 점들이 많았다. 건축학도로서 매력을 느꼈던 것은 이 집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양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동네든 비슷한 재료에 비슷한 구조, 비슷한 장식들이 사용된다. 신기했다. 어디 서양건축사에서나 듣던 '양식'이라는 것이 대충지은 집장사집에도 있다니.
집장사집에 대해 경험하게 된 것은 휴학기간 동안 건축사사무소에서 인턴을 하면서였다. 사무소는 이른바 '불란서 2층 주택'을 사옥으로 삼아 운영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건축사무소로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작은 마당과 발코니가 있었고, 돌출창과 박공지붕으로 생기는 실내공간 등등, 작은 집이었음에도 공간들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옛날집 특유의 어두운 색 목재들이 만드는 분위기도, 비 오는 날 지붕을 뚫고 들어오는 빗소리도 좋았다.
미스테리 한 것도 많았다. 바깥으로 돌출된 작은 창은 용도를 알 수 없었고, 1층의 발코니는 사람이 들어가기엔 너무 작고 불편했다. 어쩌면 어떤 양식의 흔적 같은 것이 아닐까. 언젠가 이런 것들을 한번 정리해 보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
리서치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이런 집장사집의 리서치로부터 시작한다. 자료들을 모아서 각각의 시기에 따라 유행한 집장사집들의 타이폴로지를 정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타이폴로지의 변천을 보다 보면 어떤 흐름이나 디자인들의 기원이 눈에 들어오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집장사집에 대한 문서화된 자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마치 구전으로 계승되는 이야기나 사투리처럼 누구나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기록을 찾으려니 쉽지 않았다. 아마 당시 이런 서민주택의 건설이라는 것이 시대적으로 엘리트의 영역이라기보단 민속의 영역 같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양식이 주를 이룬 그 시기에 대해서도 특정적으로 말하기 힘든 면도 많지만, 대략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불연속적인 변화처럼 표현했다.
1950년대 이전
한국전쟁 이전 많은 주택들은 조선총독부의 계획과 주택정책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 개화기의 시기답게 여러 양식의 주택들이 혼재되어 있어 크게 한식과 일식, 양식 세 가지 흐름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현재의 북촌이나 동대문일대에 남아있는 도시한옥, 일본의 전통방식을 따르는 일식주택, 그리고 서구식과 현대식을 지향하는 문화주택과 영단주택등이 있었다.
그중 문화주택은 서양식의 위생개념과 공간구조가 적용된 엘리트계층의 주택이었고, 영단주택은 전시체제의 일본이 노동자계층에 대량의 주택보급을 하기 위해 계획한 주택이었다. 영단주택은 내부는 일식의 주택구조를 따르고 있지만 콘크리트와 시멘트, 유리등의 근대적인 재료들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었다. 당시 폭격등으로 인한 화재에 대비하려 한 시도가 보인다.
1960년대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택지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조성된 저층주거지들은 단층주택들로 이루어진 지역들이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기존의 한식주택들처럼 홑집에 'ㅡ','ㄴ', 'ㄷ'자형처럼 배치가 되었다. (한옥처럼 방이 한 줄로 이루어진 구조를 홑집, 두줄이상으로 이루어져 집의 폭이 두꺼운 집들을 겹집이라 한다)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방들이 겹집의 형태로 뭉치게 되고, 집들이 마당을 둘러싸는 구조에서 마당이 집을 둘러싸는 구조로 변하게 된다. 재개발예정지들을 다니다 보면 2,3층의 다세대주택들 사이로 가끔 이런 단층주택들이 남아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1970년대
'불란서주택'이 탄생한다. 프랑스의 주택과는 상관없지만 서구식 주거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당시의 마케팅적 표현이었다. 근본 없는 용어라고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이 조차도 시대적인 분위기가 담겨있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이다. 이 시기에 지어진 주택들은 '불란서 미니 2층집', '불란서 1.5층 집' 등으로 불리며 이후 등장하는 본격적인 2층주택과 구별된다.
외형적으로는 주택의 전면을 향한 박공지붕이 큰 특징이다. 이런 형태의 박공지붕은 동아시아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였기에 더욱 서구적인 집의 상징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그 지붕 내부의 공간을 사용하지 못하고 장식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이때까지 지붕을 대부분 목구조로 짰었고, 단열이나 마감의 기술이 부족해 이 공간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보일러를 이용한 난방으로 지하실이 생겼고, 1층은 지상에서 단차가 생겼다. 이로 인해 마당으로 쓰이던 과거의 외부공간이 정원의 개념에 가까워졌고, 1층에 작은 테라스 공간이 생기기도 했다.
이때가 되어서 현대적인 통합형 화장실이 적용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변소와 욕실이 구분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또한 주방과 부엌이 연결되어 있는 Dining Kitchen의 개념도 이 시기에 도입된다. 현대 주거의 공간개념이 많은 부분 생겨난 시기였다.
1970년대 말
도시에 2층주택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불란서주택이 2층 버전으로 진화한다. 벽체는 연와조를 이용하면서도 바닥과 지붕구조체를 콘크리트 슬라브로 만들어 2층과 옥상의 공간을 만들기에 더 적합하도록 했다. 또한 보일러의 보급도 2층주거가 본격화되는 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층에도 난방이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2층에도 침실공간들을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외형적으로는 불란서주택의 형태가 2층으로 변화하면서 높이제한 때문에 기존의 박공지붕의 경사는 완만하게 변화했다.
그리고 도시화로 인해 주택수요가 많아지자 하나의 주택을 여러 세대가 나눠 쓰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를 위해 기존의 내부계단을 막거나 철거하고, 외부에 별도의 계단을 설치해 세대별로 다른 진입동선을 확보했다. 서구식 주거를 상징하던 발코니가 세대구분을 위한 진입공간이자, 작은 마당 같은 공간이 되었다. 이후 정부가 다세대주택이라는 유형을 신설하기 전부터 이런 식으로 자생적인 다세대 주택들이 만들어졌다.
1980년대
80년대에 들어서 태생부터 다세대주택인 집들이 도시를 채우기 시작한다. 당시 한국은 이른바 '3저호황'에 힘입어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다. 때문에 부동산값은 오르고, 증가하는 수도권 인구에 비해 주택공급은 여전히 부족했다. 6,70년대에 그토록 택지를 개발했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한 것이다.
개발할 수 있는 택지에는 한계가 있다 보니 정부는 같은 땅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살게 할 수 있는 여러 정책들 생각해 냈다. 그런 방안 중 하나가 '다세대주택'이라는 유형의 신설이었다. 다세대주택은 기존의 연립주택, 아파트와 같이 여러 세대들이 높은 밀도로 함께 사는 주택을 작은 필지에서도 가능하게 한 것이 핵심이다.
다세대주택은 공간을 뽑아내는 데에 유리했다. 인동간격, 주차, 화재나 피난에 대한규정이 기존의 공동주택유형들에 비해 대폭 완화되었다. 옥외계단은 폭 1m까지 건축면적에서 제외되었고, 이때부터 반지하공간에도 거주가 가능해졌다.
집장사들은 이런 완화된 정책 속에서 능력을 펼쳤다. 집단지성의 위대함일까, 그들은 면적과 세대수를 뽑는 데에 있어서 천재적이었다. 건물을 감싸 올라가는 기괴한 외부계단들과 가성비 좋은 눈썹지붕을 만들어 기존의 불란서 주택을 한번 더 진화시켰다. 이로 인해 주변에서 아직 볼 수 있는 골목길 풍경이 만들어졌다. 좁은 외부계단이 둘러진 적벽돌의 주택들. 반지하와 샷시. 당시 정책입안자들이 상상한 풍경이었을까.
1990년대
다세대주택의 기준은 더 커졌고, 단독주택의 범주안에 다가구주택의 유형이 신설된다. 다세대주택의 기준이 연면적 330m²이하에서 660m²이하로 늘어났고, 3층이하의 기준이 4층이하로 늘어났다. 다가구주택은 한 명의 소유주가 모든 세대공간을 소유하는 단독주택일 뿐, 주택의 층수가 3층이하여야 한다는 점 이외에는 다세대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세대주택과 다가구주택은 대지경계선으로부터 2m, 1m씩만 띄워도 되었기에, 높이의 절반을 띄워야 하는 연립주택에 비해서도 면적을 뽑기에 확실히 유리한 유형이었다.
이렇게 들어서는 주택들의 면적과 세대수, 층수가 동시에 늘어나면서 구조와 평면들이 기존의 공동주택들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또 같은 필지 위에 더 큰 집을 지어 올려야 했기 때문에 집들의 형태는 점점 성냥갑에 가까워지게 된다. 그래서 기존의 박공지붕이나 발코니, 돌출창 같은 요소들은 사라지거나 형식적으로만 달려있게 되었다. 이런 집들은 초기의 불란서 주택처럼 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1990년대 말 이후
2000년에는 1층 전부를 필로티주차장으로 쓸 경우 층수산정에서 제외하면서 다세대주택은 사실상 5층, 다가구주택은 4층에 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과거 다세대주택의 외부공간과 진입동선은 사라지고 사실상 아파트나 연립주택과 같은 공간구조를 가지게 된다. 공동의 현관, 계단실을 통해 각각의 세대들에 진입하게 된다. 필로티를 주차공간으로 활용하며 주거공간은 지상과 완전히 분리된다.
이제 더 이상 저층주거지가 아파트에 비해 가져갈 수 있는 메리트가 없는 시점이 되었다. 인동간격이나 외부공간면에서의 쾌적도가 떨어지고 동시에 주택들의 공간구조는 아파트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OO빌라, OO빌, OO캐슬, OO하이츠 등등의 이름이 붙은 집들이다. 외관적으로도 변화를 주어, 이전까지의 적벽돌과는 달리 화강석등의 석재로 마감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연와조(조적조)에서 철근콘크리트조로 건물의 구조가 변함과 함께 외부 마감방식도 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적벽돌이 어둡고 구옥의 상징으로 느껴졌는지 사람들은 화강석과 유광의 석재들을 썼다. 하지만 이 풍경은 더욱 기괴하다. 대형 오피스에나 쓸 법한 큼직한 석재타일들을 작은 건물에 쓰면서 골목길 풍경은 딱딱하고 차가워졌다. 또한 타일을 이용해 마감했음에도 필로티 부분을 충분히 신경 쓰지 않아 그 허접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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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의 변천사를 정리하고 보니 몇 가지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국의 저층주거지는 지금 생각하면 농촌이나 전용주거지만큼의 여유로운 밀도로부터 시작했다. 그런 낮은 밀도로 계획된 도시가 불과 2,30년 후에는 두세 배 이상 높은 밀도의 주거공간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저층주거지들은 그만큼 초기에 의도되지 않은 과중한 밀도를 감당하고 있다. 무책임한 계획아래에 매번 규제완화만을 반복하면서 근본적인 원인을 방치한 결과다.
그런 저층주거지이지만 이곳의 집들에는 매력적인 디테일 요소들이 풍부했다. 적어도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집들이 그런 낭만이 있었다. 처음 불란서주택을 짓던 사람들의 초심이 느껴진달까. "집은 이래야 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보이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건물이 변해갈 때에도 그들이 고수했던 것들을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하는 고집이 느껴진다. (예를 들자면 박공지붕, 발코니 석재난간, 목재천장마감, 베이윈도 같은 것들)
공간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발코니나 외부계단 같은 외부공간이 풍족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그 공간들이 주택에는 숨 쉴 틈을 만들어준다. 이웃을 마주하게 되는 내외부의 중간적 공간이면서 화분을 놓거나 이른바 샷시로 유리온실을 만드는 등 주민들의 성향이 드러나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공간들의 스케일들도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학교에서 문은 900mm, 통로는 1200mm 정도의 폭을 가져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이 집들은 그런 거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집들의 외부계단이나 통로들은 시공자의 어깨너비를 기준으로 했나 싶을 정도로 작다. 천장의 높이나 난간의 높이도 마찬가지다. 이런 집들을 경험하면서 치수라는 것이 주는 매력들에 대해 느꼈다. 고정관념(?)을 조금 버리게 되면 엄청난 효율과 재미난 공간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의 주택과 도시의 매력은 그런 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딘가 어설프고 조잡하지만, 실용적이고 인간적인 공간. 집장사집들과 이 집들이 이루는 동네들에 대해서도 그런 관점으로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주거공간들의 대표가 될 만한 사이트를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었다. 다음 글에서는 그런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참고자료-
주로 이 책들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한국의 주택과 도시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길 추천한다.
빌라 샷시 _권태훈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_임창복
한국주택유전자 1,2 _박철수
서울탄생기 _송은영
주거문화의 충돌과 융합 _서울연구원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5 _손정목
한국 주거의 공간사 _전남일
한국 주거의 미시사 _전남일
서울해법 _김성홍
서울 어바니즘 _이상헌
1970년대 이후 도시 단독주택의 공급 및 외관형태 특성 _유복희
건축법규 변화에 따른 다가구주택의 특성에 관한 연구 _박기범, 최찬환
한국 도시주택의 변천에 대한 연구 _임창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