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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한 다락 Jul 11. 2020

코로나 19와 서양인의 개인주의(2)

기독교, 모더니즘

서구의 개인주의를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기독교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같이 살펴야 한다. 시간순으로 따라가 보자.      




313년 로마 제국 황제 중 한 명이었던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전투 중에 일어난 일이다.


회심한 후 그는 연전연승으로 결국 통일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기독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많이 펴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왼쪽은 성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 작품 (자신이 세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장면) 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아니었어도 기독교의 인정은 사실 시간문제였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생명과 재산을 뺏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신앙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불어만 갔다. 그렇다면 박해만 거두어들여도 됐을 걸, 굳이 국교화를 해야 했을까? 


하필이면 콘스탄티누스는 사명감으로 충만하면서 분열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황제가 주도하여 교리를 일원화하고 제도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 영향은 먼 후대에 가서 더 크게 나타난다. 


종교 체계가 정치 체계와 비슷해졌고(신앙 타락의 가능성) 모든 예술과 학문은 종교를 기반하여 성장해야 했다(학문 예속의 가능성). 어쨌거나 그 이후 기독교는 서양에서 2000년간 모든 학문의 기본 세계관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와 인권의 근거


서양 인권을 공부하다 보면 인권의 근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나오는데 첫 번째 근거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근거이다. 예수는 “온 천하보다 한 영혼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도 사람들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 사상이 왜 인권의 근거가 되는지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이 종교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차이 때문이다. 


기독교 이전의 고대 종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자기에게 올 화를 면하고 복을 얻기 위한 것을 그 목적으로 두고 있었다. 이를 위해 자식을 제물로 내놓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굳이 인신 공양을 하지 않더라도 아동은 부모의 예속물로 봤던 게 동서양에 걸쳐 일반적이었다. 


그게 불과 100여 년 전까지의 얘기다. 1970년대에 나온 성룡의 영화 ‘취권’만 봐도 알 수 있다. 


인신공양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네에게 바쳐지는 처녀 설화'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그림은  고대 근동에서 행해지던 아동 인신공양 장면.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반대로 신이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아들 예수를 죽게 내어준 것이다. 지금이야 너무 자주 들어 별 감흥이 없겠지만 당시로선 혁명적으로 관점이 전환된 것이었다. 그 이유가 “온 천하보다 한 영혼(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라니, 바로 여기서 서양 인권은 출발한다. 


그러나 천동설 탄압과 마녀사냥에서 보듯, 현실에서는 기독교가 학문과 인권을 탄압하는 사례가 훨씬 빈번했다. 한 종교를 국교화하면 진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대거 입교하게 된다. 기독교가 정치화·교조화하여 중세 봉건제와 맞물려 단단한 구조를 이룬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서양 중세 봉건제를 나타낸 그림. 제일 밑 칸에서 평생 짓눌린 생활을 해야  했던 농노는 지금으로 치면 일반 시민들이다.



이성의 추구


교회가 성경에 쓰인 대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는 커녕 그보다 못한 결정을 계속 내리자 신앙을 대신해 새로이 등장한 인권 근거는 ‘합리적 자아’였다. 즉, 인간만이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에 독특하고 존엄하다는 것이다. 


그 이 주장의 배경에는 새롭게 발견한 외부 세계과 물질적 부가 있다. 


유럽에게 다가온 ‘외부 세계’는 두 종류였다. 시간적으로는 르네상스를 통해 들어온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가, 공간적으로는 탐험을 통해 장악한 식민지가 그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그린 르네상스 미술작품(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과 노예무역과 식민지 착취로 이어진 식민지 무역



불균형한 식민지 무역은 이전에 없던 규모의 물질적 부를 창출했고 그것은 유럽으로 차곡차곡 쌓여 들었다. 부유함이 사람에게 주는 자신감과 여유는 어마어마하다. 


교회의 행태에 대한 실망와 물질적 자신감이 합쳐져 점점 신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체로 근대 초기에는 세속적 계몽주의자들이, 근대 후기에는 과학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이성을 도구이자 목표로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기독교인임을 자처한 경우에도 신이 아니라 ‘자신이 사고한다는 사실’을 존재의 근거로 삼았던 데카르트같은 사람의 영향은 컸다. 


계몽주의, 과학, 자본주의의 발달은 인간 존재의 근거로서 신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이성을 채워 넣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그들의 이성에 대한 자신감은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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