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개인의 등장
서양 근대에서 합리주의가 전개될 동안 같이 자라난 게 자본주의다. 시대를 따라 더 내려가기 전에 자본주의와 서구 개인주의를 함께 살펴보자.
애초에 인류 역사상 소유권의 개념은 지금처럼 무소불위의 힘이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봉건제 붕괴로 인해 ‘누가 부를 소유할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결국 점차 와해되는 마을공동체나 가문보다는 개인이 적합하다고 여겨지게 된다.
자유무역은 참가한 사람이 그 결실을 가져갔고, 점차 등장한 산업구조도 개인에게 월급을 주는 형태였으니. 개인이 물질적 부를 쌓아도 되는 것이 허용되면서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돈을 추구하게 된다.
사실 이것도 혁명적 전환이다. 중세시대에는 탐욕이 7대 죄악 중 하나였던 반면, 자본주의는 말을 고급스럽게 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돈주의 money-ism’ 아닌가?
그렇게 일반 사람들은 신이 있던 자리에 이성이 아닌 돈을 놓았다.
미국 패션잡지 <vanity fair> 원래 '허영의 도시'는 <천로역정>에서 돈과 허영을 좇는 인간을 비판하려 만든 말인데, 20세기 자본주의는 대놓고 그걸 잡지 이름으로 삼았다
산업 도시가 발달하면서 점차 마을·종교·가족 공동체는 무의미하다고 할 만큼 역할이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다양한 규모의 공동체가 맡았던 탁아, 교육, 보건, 복지의 역할을 국가가 넘겨받게 되고, 국가의 상대 주체로서 ‘개인’이 전면에 등장한다.
법치주의가 확립된 근대 민주국가에서 국가가 행하는 합법적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도 개인이고, 그에 맞서는 주체도 개인이다.
동시에 자본주의에서 거래와 계약의 당사자도 기본적으로 개인이다. 사회 구성 단위이자 주체로서 ‘개인’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고하는 나, 돈을 버는 나, 성공하는 나, 자유로운 나.
서양과 그 영향을 받은 현대 세계에서 참으로 잘 먹히는 광고 이미지 아닌가? 자본주의는 ‘나’를 팔고 ‘소유’를 파는 허영의 도시로 이루어진 세계다.
이성의 실패, 그리고...
가장 걸출한 근대 철학자와 문학자를 배출한 독일(프랑스는 인정 안 하겠지만)이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
유전적 우성학을 논리적 근거로 삼아 열등한 민족이나 장애인, 정신병자를 죽여 없애고 인체로 비누를 만드는 실험을 한 자들이 이성을 그리 내세운 그 유럽인들이다. *
독일 인문학탑.
다른 유럽 나라는 그에 대항해서 싸웠다고? 1차 대전은 더 많은 식민지를 얻기 위해 그들끼리 치고받은 싸움이다.
그들의 부가 식민지 사람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는 걸 외면하는 신앙과 이성은 정말 어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이는 서양의 ‘식민지’ 개념 및 외국어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깊은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한 번 다루려고 한다)
양대 세계 대전으로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이성적 인간상’을 더는 이상향으로 기대하지 못하게 된 서양 철학계는 그 대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모더니즘을 잇는’ 또는 ‘모더니즘을 뒤엎으려는’ 시도였을 뿐, 결국 모더니즘의 후속작으로 남게 되었다.
합리성을 추구했던 모더니즘의 이상적인 자아 “생각하는 나(이성적 인간)” 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을 슬그머니 빼버리고 그냥 “나(인간)”를 추구했을 뿐이기에.
포스트모더니즘과 개인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체로 상대주의, 다원성, 권력 구조 분석 및 권위의 해체를 주장했는데 이는 대중들에게는 훨씬 가볍게 받아들여졌다.
원래부터 대중들은 학자들이 쓰는 전문적 용어를 기억하기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기도 하고, 또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권위의 해체를 통해 ‘가벼움’을 높이 산 탓도 있을 것이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이런 영향을 끼쳤다.
상대주의 → “모든 건 상대적이다.”
다원성 → “너도 맞고 나도 맞다.”
권력 구조 해체 →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넌 뭔데?”
상대주의, 다원성, 권력구조해체는 인문학의 일부 분야(문화인류학이나 여성학)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그 외의 학문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특히 과학자나 좌파 학자들, 종교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포스트모더니즘도 변형, 분화하면서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좌파과학자 앨런 소컬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허세를 증명하기 위해 일으킨 가짜논문사건에 대해 설명한 책.
하지만 주체로 살고 싶어 하는 개인에게는 포스트모더니즘만큼 근사한 철학이 없다. "나”를 자유롭게 하고 높여주는 철학적 근거가 있다니!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상관없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저런 극단적인 주장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대중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요즘은 변치 않는 진리, 절대적인 것 또는 어떤 권위나 덕을 얘기하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여기는 풍조가 있다.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해야 세련되고 열린 사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보다 문화에 영향을 많이 끼쳤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세가 절정이던 90년대에 만들어진 미드 ‘프렌즈’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결혼식 주례를 일반인인 지인에게 요청하는데, 주례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선포한다.
“내 이름으로 이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선포하는 바이다.” 이 장면에서 배우는 “내 이름으로”를 무척 강조한다.
원래 서양 문화에서 결혼식 장소가 교회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시청이라면 공무원이 법령에 근거하여 선포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간 것이다.
드디어 한 개인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사회가 몇 백 년 동안 이성을 모아 합의한 것(법, 규범, 덕)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 올랐다.
드라마의 한 장면일 뿐이라고? ‘프렌즈’는 90년대 서구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다. 서구 문화를 공유하는 아시아에도 인기가 많았고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대중의 사고를 반영하고, 대중의 열망을 잘 담아낸 거울이라고 봐야 한다.
(계속)
*여담이지만, 서양인들이 개고기를 가지고 한국인을 미개하다느니 비하할 때 "그래도 우린 사람 가지고 비누는 안 만들었는데?"라고 하면 다들 입을 다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