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국가들이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을 칭찬하면서도 떨떠름해 하는 부분이 있다. 감염자의 개인정보 침해에 관한 것이다.
감염자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휴대폰과 신용카드 내역을 추적하고 동선을 공개하는 한국의 방역방식에 서구 사람들은 정부, 언론, 시민사회 가릴 것 없이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이는 국가 권력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이기 때문에, 사실 민주 국가에서는 꼭 다뤄야 하는 의제가 맞다.
그런데 이 주제와 관련해 얼마 전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칼럼을 보고 나는 매우 화가 났다. 그 칼럼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세계적으로 ‘작은 정부’는 물 건너갔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의 역행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한국을 다른 아시아 전체주의 국가와 뭉뚱그려 한 범주에 넣고 있었고, 심지어 ‘작은 정부’만이 민주정부인 것처럼 포장해 독자의 사고를 오도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확진자 동선 공개를 ‘침해’라고 바라보는 그들의 견해에 대해 나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던 참이었다.
이코노미스트 한국어 요약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200327076400009?input=1179m
전국민 이동 제한 vs 확진자 동선 공개
서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나고 코로나19 사태를 보면서 한국인들이 가장 놀란 점은 ‘선진국이라는 저 나라들이!’였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바이러스를 정부가 만만히 보다가 뒤늦게 허둥거리는 모습은 그럴 수 있다 치자.
그거야 지도자 한 명의 역량에 따라 완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해한다. 아무리 실무진이 경고를 해도 지도자가 그 경고를 무시해서 결정적 시기를 놓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트럼프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그런 적 있다.
왼쪽 사진은 스페인에서 마련한 코로나 19 임시치료센터. 군인이 지키고 있다. 오른쪽은 한국의 경증환자를 위한 생활치료센터. 리조트를 활용했다. (사진: AFP 연합뉴스)
그런데 전염병 막겠다고 전 국민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리고 경찰과 군대가 드론으로 감시를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이거야 완전히 독재 국가의 모습 아닌가! 왜 비감염자까지 집 밖을 못 나가고 감시를 받아야 하냐고. 그러면서 한 줌도 안 되는 감염자의 동선 공개에 개인정보 침해 따위를 운운하다니.
한국에서 공개하는 것은 확진자가 사는 지역과 며칠 간의 동선이다. 본인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주소를 공개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전 국민의 이동 자유가 박탈당하는 것은 받아들이면서 확진자의 동선 공개를 트집 잡는 것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인권이 그리 걱정된다면서 계엄령보다 심한 전국민 이동 제한령, 지역 봉쇄령은 어떻게 그리 쉽게 내리나?
한국은 대구가 전체 확진자의 80%를 넘을 때도 봉쇄하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
정부가 패닉에 사로잡혀 극단적 처방을 하면 국민들도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건 국민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정부가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그렇다. 정확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유언비어에 휘둘리게 되고, 내 생명이 위험하다 싶으면 생존 욕구가 먼저 발동된다.
사재기가 일어나고 감염자에 대한 낙인, 외부인에 대한 차별, 공동체 정신의 파괴가 차례로 따라온다. 최악의 상황은 본능이 이성을 지배하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까지 가는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노인들이 요양원에서 집단감염되어 버려져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남은 노인들의 자녀들은 만나러 가보지도 못하고 애만 태우는 상황이라고 한다. (사진: AFP 연합뉴스)
정부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미리미리 개입을 해야 한다. 사재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봉쇄령을 내리지 않고, 차별과 낙인에 대해 철저히 경고하고 처벌하며, 가장 선봉에서 싸우는 사람이 가장 먼저 배려 받도록 자원과 물자를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고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국민이 세금을 내는 이유고, 정부에게 합법적인 폭력의 행사를 맡긴 이유다. 그런데 서구 정부가 그렇게 하고 있나? 한국과 유럽, 어느 쪽 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더 보장하고 있는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작은 정부 vs 큰 정부
작은 정부에 대해 얘기해 보자. 작은 정부는 원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이다.
시장에 대한 개입을 정부가 최소화하고, 공공 영역으로 관리해야 할 사회적 재원(전기, 철도, 공항 등)의 운영까지 민간에 넘기자는 논리다. 경쟁시키면 서비스가 더 좋아진다나.
자유주의자의 원조인 애덤 스미스도 하지 않은 극단적 시장 자유를 주장하는 이 사람들이 세계은행과 IMF를 지배한 결과가 세계의 양극화이다.
해고와 불안정한 일자리가 일상이 되었고, 민영화된 서비스는 하늘 모르게 값이 치솟았으며, 기업 CEO들은 회사에 명백한 해를 끼치고도 몇 백억 씩 퇴직금을 받아먹는다.
영국철도는 1993년 민영화뒤 잦은열차 충돌과 탈선으로 35명이 사망하고 590명이 다친 반면 운임은 물가상승률보다 2배이상 올랐다. 사진은 코로나19로 인해 한산해진 영국기차역
이런 게 민주주의라고? 작은 정부는 민주 정부와 절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크기가 어쨌건 제대로 일하는 정부다.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하지 마라.
개인과 시장에는 무제한 자유 vs 정부에는 무조건 고삐
시장(기업)이 무제한으로 내 개인정보를 사용하는 것에는 둔감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정부가 일시적으로 동선을 공개하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는 개인에게 묻고 싶다.
현대 세계는 거의 모든 IT 기업이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다 수집할 수 있다. 내 편의를 위해서 내가 동의했다고 치자.
그러면서 정부가 나의 며칠간의 동선을 공개하겠다는 데 반대하는 개인은 그 공동체 속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 편의를 위해선 SNS에 내 위치와 얼굴까지 제공하여 검색 가능하게 해 놓고, 공동체를 위해서는 며칠간의 동선도 공개 못 하겠다?
개인의 인권은 민주주의의 초석이다. 투표할 권리, 의사표현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집회의 자유가 여기에 다 포함된다. 그렇기에 개인주의는 매우 중요하며, 시민은 자기 개인정보의 처리에 민감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비상 시국에 정부가 사람의 생명을 위해 사용하려는 것에는 예외를 두어야 한다. 공동체가 안전하게 유지되어야 개인의 권리도 행사 가능하다.
개인의 욕망과 기업의 이윤추구는 무제한으로 허용하면서, 정부가 실행하는 거라면 공동체를 위한 것조차 반대부터 하는 건 개인주의가 아니라 그냥 이기적인 거다.
프랑스 정부가 다중 이용 시설을 폐쇄하자 파리의 공원에 산책나온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이 뉴스에 한국인들은 혀를 찼다. 심지어 마스크도 안 끼고! (트위터 캡쳐)
마지막으로,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시민의식을 발휘하여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는 것을 순종적이어서 그렇다고 깎아내리는 사람에게 한 마디.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국민 스스로가 피 흘려 민주정부를 정착시킨 나라이다. 대통령이 민주적이지 않았을 때는 국민들이 비폭력 집회와 완벽한 민주적 절차로 탄핵까지 시킨 경험도 있다.
그러니 국민이 순종적이어서 그렇다느니, 아시아는 전체주의적 경향이 있다느니 하는 말은 편견일 뿐이다. 질투가 나면 그냥 인정하고 배워라. 부러운 상대를 깎아내리는 건 찌질한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