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돌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돌의 형태와 질감만 보면 어느 지방의 것인지 어떻게 사용할 때 가장 쓰임이 좋은지를 단번에 알아보는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문화유산 답사를 하면서 이러한 꿈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 날 정말 돌 전문가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월지에 가면 천 개의 돌이 있는데, 그 돌을 유심히 살펴보세요. 어떤 이치를 깨닫게 된다면 장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최고의 돌 전문가는 신라시대의 장인이며 그보다 돌을 잘 놓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가 그가 덧붙인 말이다. 월지는 이전에도 몇 번 가 보았지만 돌을 유심히 본 적은 없었다. 경주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월지를 찾았다.
월지는 월성의 정원이다. 신라의 왕궁인 월성 동쪽에 월지를 조성하고 5년 후에 임해전을 비롯한 동궁을 만든다. 정원을 만든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2년 전, 동궁을 만든 것은 통일 후 3년이 지나 서다. 정원을 만들면서 건축물을 5년이나 지나 완공한 것은 이 시기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14년 전 백제를 정복했고, 6년 전 고구려도 정복했지만 당을 물리치지 않으면 완전한 승리라 할 수 없었다. 승리를 기원하며 신라는 정원을 만든다.
국가의 동력을 온전히 전쟁에 써도 모자랄 때에 정원이 무슨 의미라고 승리를 기원한 것일까? 보통 세 개의 섬을 둔 연못은 삼신산을 상징한다. 하지만 월지 연못의 세 개의 섬은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를 표현한 것 같다. 북쪽의 중간 크기의 섬은 고구려, 서쪽 자그마한 섬은 백제, 남쪽의 거대한 섬은 신라를 상징한다고 보면 세 나라는 하나이며 당을 물리치기 위해 모두 힘을 합친 모양새다.
하지만 힘을 합치는 것으로는 모자랐다. 주술적인 힘이 필요했다. 애초에 정원을 조성한 것이 신앙적인 행위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하나의 정원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입수부는 가느다란 수로에서 갑자기 거대한 돌확으로 떨어진다. 이 거대한 물확은 두 단으로 되어 있는데 그 모양이 참 특이하다.
윗단의 돌확에는 아마도 용이나 거북이 머리가 끼워져 있었을 것 같은 홈이 파여 있다. 아랫단도 부정형의 수조인데 윗단도 아랫단도 통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다.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굴곡을 준 통돌은 바깥의 판돌과 모양을 맞춰 끼운 형식이다. 돌과 돌의 얼개를 맞춰 끼우는 형식은 분황사의 기단, 불국사의 석단에서도 볼 수 있는 신라 고유의 기법이다. 돌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깎을 수 있는지 화강암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 특별한 수조를 지난 물은 정기를 담게 된다. 아마도 용을 믿었던 신라였으니 용의 머리였을 거라 추정해본다. 이 물은 땅속으로 잠시 숨었다가 자연 계류의 형상을 한 물길을 거쳐 두 단의 폭포를 통과해 월지로 쏟아진다. 하지만 임해전에서는 폭포를 볼 수 없다. 물의 파장도 보이지 않는다. 물줄기는 남쪽 큰 섬에 부딪힌 후 잔잔하게 퍼져나간다. 물은 흐르고 흘러 북쪽으로 나간다. 마치 당이 북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양이다. 원래 북쪽에 있는 물줄기를 남쪽으로 끌어와 이러한 입수 과정을 거쳐 월지로 들어가게 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월지의 모든 것은 완전한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모습이다.
임해전에서 반대편 정원에 놓인 돌들을 보았다. 이전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돌들이 보였다. 어째서 보이지 않았을까? 이렇게 크고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돌이 수백 개나 있는데? 하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돌은 물가에 있었고 울타리는 물가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쳐져 있었다. 울타리가 인도하는 길만 조용히 걷다 보면 그냥 나무가 우거진 길을 지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전에는 밤에 왔었다. 월지의 야경이 하도 유명해서 밤의 경치를 즐겼다. 조명이 곳곳에 있었지만 그 주인공은 임해전일 뿐 천여 개의 돌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 지금은 평일 아침, 월지는 조용했고 나는 밧줄로 된 울타리를 가볍게 넘어 물가로 갔다. 연못의 가장자리를 전문 용어로 지안池岸이라 한다. 지안의 암석 군락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월지의 돌을 유심히 보라고 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단순히 연못을 썰렁하게 하지 않으려고 여기저기 자연스럽게 놨나 싶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아니었다. 계산된 구도가 눈에 보였고 여러 개의 군락은 동일한 맥락이 있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단순한 돌의 배치가 아니라 돌 들 사이의 관계가 보였다. 이쪽에서 볼 때는 대 여섯 개의 돌이 하나의 군락을 이루었고 반대편에서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외따로 있는 돌이 바로 또 다른 구도를 형성했다. 이 모든 것이 계산된 것인지, 과대해석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일제강점기 때 발굴 조사된 월지의 상태가 현재와 얼마나 비슷했는지 알 수 없다. 아쉽게도 해당 연구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고 확인하려면 전문적인 문헌조사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는 후에 변화를 거쳤다 하더라도 수많은 군락들이 보이는 동일한 특성들은 신라시대부터 유지되어 왔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후의 어느 시기에 대단한 장인이 조성한 것이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가장 큰 특성은 땅과 만나는 면석의 각도가 90도 보다 작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돌의 면이 땅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누워 있는 모양을 띄어 안정감을 주지 올라갈수록 쏟아질 것 같아 위태로워 보이는 돌은 천 개의 돌 중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 특징은 경사지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면석의 각도가 점점 가팔라진다는 것이다. 가장 아래에 놓여 있는 돌은 거의 누워 있다. 납작한 돌도 많다. 군락 가장 윗부분의 돌들은 거의 세워져 있다. 하지만 완전히 세워지지는 않는다. 이들 돌들 가운데 경사의 위계를 거스르는 돌은 없다. 앞쪽보다는 가팔라지지만 뒤쪽보다는 누워있다. 항상 그러하다. 이 법칙을 거스르는 돌은 하나도 없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교토 도후쿠지의 시게모리 미레이의 작품을 보고 역시 내가 찾은 특징이 한국적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일본의 돌 놓는 법은 앞에서 말한 특징을 모두 거스르는 배치 구조이다.
대부분의 돌이 90도를 유지하거나 혹은 덮치는 듯한 모양이었다. 도후쿠지의 암석 배치를 보며 무자비한 자연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자연은 위태롭고 삶을 덮치는 대상이었고 이러한 자연과 삶이 공존하는 것 임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아름다웠다. 고요한 공간의 강인한 에너지는 자연의 순환 속에 찰나를 살다가는 인간의 존재를 생각해보게 했다.
월지의 돌은 서로가 서로를 돕고 배려하는 관계이다. 어떤 하나의 돌이 내가 잘났다고 나서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크고 육중한 돌도 다른 돌들을 아우르는 듯하고 작은 돌들도 큰 돌을 받쳐주는 듯하다. 시게모리 미레이의 작품처럼 첫눈에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다. 조화를 이루는 천 개의 돌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돌과 돌 사이의 공간에서 그 관계성이 보인다. 관계가 없다면 아름답지 못할 돌들이다. 돌 만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돌과 돌 사이 공간의 아름다움에 눈이 간다. 계속 보고 있으면 아까는 놓쳤던 다른 돌과의 관계도 눈에 들어온다.
작품이다.
나는 여전히 돌 전문가의 꿈을 꾸고 있다. 정원을 연구하면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들은 모두 돌이었다. 특히 부석사의 석축과 월지의 돌을 본 후 이 오래된 돌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많은 곳을 여행 다니며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았지만 이렇게 마음속 깊이 박힌 것은 없었다. 아무도 월지에 돌을 보러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전 세계인이 경주에 가면 월지의 돌과 돌의 관계를 느끼기 위해 찾아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