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석가모니가 죽고 그의 사리를 넣은 탑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와 사찰의 형태가 되었을 때 한국의 사찰은 평지에 있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한국 사찰의 정식 명칭은 ‘산사山寺’이다. 한국 사찰의 고유성을 산에 있는 사찰로 본 것이다. 한국 사찰이 산으로 들어가게 된 배경은 다양하다. 단순히 조선시대 불교 억압이 그 이유라고 하기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산사를 설명할 수 없다.
통일신라시기부터 점차 산으로 들어간 사찰은 고려시대 풍수지리 사상의 유행으로 본격적인 자리 잡기가 시작된다. 이전까지는 군사적 요충지를 선점하고자 하는 권력집단과 중앙 정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두 세력이 각기 다른 요인으로 산에 들어갔다면 산 자체가 불교의 공간으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중문-답-금당으로 이어지는 정형적인 사찰의 형식이 산으로 가면서 무너지게 된다. 더 이상 평지가 아니기에 일직선의 축으로 공간을 형성하기가 어려워졌다. 본격적인 산사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불교의 세계관을 공간적 형태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일주문-사천왕문-불이문 구도이다. 불교의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수많은 바다와 산맥을 건너 수미산에 당도하고 산 정상에 오르면 무아無我의 세계에 이른다. 일주문은 수미산 초입을 상징하고, 사천왕문과 불이문을 지나 마침내 대웅전에 당도하는 것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아미타여래불 등이 있다. 각각 대웅전, 대적광전, 극락전(혹은 무량수전)이라 부르는데 한국의 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물이다.
부석사의 길은 좁고도 길다. 일주문을 지나 마침내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약 440m의 길은 가파르다. 수행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견뎌 마침내 안양루에 도착하면 끝없는 산맥의 향연이 눈을 가득 채운다. 길고 좁은 길 끝에 펼쳐진 탁 트인 시야는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웅장함 속에 나라는 존재의 사소함은 이 거대한 자연 앞에 티끌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눈앞에 닥쳐 있던 고난의 허덕임은 탄성이 되어 산맥 그 어딘가로 날아가버린다.
서양의 성당은 앞도적인 높은 천장을 통해 신의 존재를 드러냈다면 한국의 사찰은 겹쳐진 능선들의 아늑함 속에 겸허함을 느끼게 한다. 무량수전의 소박하지만 단단한 아름다움은 안양루 앞의 전경과 잘 어울린다. 스케일이 크거나 화려한 건축물이라면 안양루 앞 경관 앞에서 초라해 보일 뿐이다. 소박하기에 끝없는 능선이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
일주문에서 무량수전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시퀀스(sequence)는 거장의 연출력이다. 그중 눈에 띄지 않게 부석사의 품위를 한 층 드높이는 장치가 있으니 바로 석축이다.
석축의 높이는 2.5m에서 3m 내외이다. 한 변의 길이가 50cm에서 1m가량 되는 거대한 암석들 사이로 작은 돌들이 정교한 각도를 이루며 큰 돌을 이끈다. 처음에는 부정형 자연 암석의 크기와 투박함이 눈에 들어오지만 점차 암석들 사이로 흐르는 선의 정교함에 빠져든다. 한 편의 거대한 추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은 어쩐지 이곳을 순간 갤러리라 착각하게 한다.
만약 일정한 형태로 깎아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형태의 석축이었다면 부석사의 좁고 긴 길은 옹졸해 보였을 것이다. 큰 암석이 밑에 깔리고 올라갈수록 점차 돌이 작아지는 형태의 석축 또한 좁은 길을 궁색해 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과 작지만 전체의 흐름을 이끄는 작은 돌들의 조화는 부석사를 품위 있게 만들 뿐 아니라 ‘웅장함과 소박하지만 단단한 아름다움의 조화’라는 부석사의 전체를 아우르는 테마에도 들어맞는다.
부석사의 연출은 두 명의 거장이 맡았다. 사람의 눈높이에 능선이 스며들 수 있도록 높지도 낮지도 않은 자리를 찾아 클라이맥스를 연출한 것은 통일신라의 의상대사이며, 좁고 긴 길에 공간의 품위를 높이는 석축은 고려의 원융국사의 작품이다.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의 공간에 가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남아 있는 기운이 있다.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길에 놓치지 말고 석축에 올라 천년의 세월을 버텨온 돌에 가만히 손을 대보자. 천년의 돌과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을 가슴에 품고 무아無我의 경지 즉, 허공은 무한하다고 체득하는 경지, 마음의 작용은 무한하다고 체득하는 경지,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체득하는 경지, 마침내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가 무엇인지 떠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