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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표가 되는 질문

경주 독락당

by 월하랑


20대 한창 열정 가득한 삶을 살던 시절 매년 꼭 이루고 싶은 꿈을 적어 벽에 붙여 놓았다. 그렇게 선별한 하나의 문장을 정성스럽게 벽에 붙이면 신기하게도 그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졌다. 30대가 된 후에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설정한 목표가 맞는 방향인 건지, 길을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삶의 지표를 잃었다.


정선,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 왜관수도원


공자는 제자들에게 어느 날 질문을 한다.


“너희들은 평소에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데 만약 누군가 너희들을 알아줘서 큰 자리에 등용하려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어떤 제자는 ‘군사력을 강화해 강인한 나라를 만들겠다.’ 하고 어떤 제자는 ‘백성들이 모두 풍족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답한다. 훌륭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거문고를 연주하던 제자 증점이 답한다.


“저의 꿈은 소박합니다. 어느 저물어가는 늦봄, 깨끗한 봄옷 갈아입고, 좋아하는 친구 대여섯 명과 어린아이 예닐곱 명과 손잡고 물가에서 멱 감고, 정자에서 바람에 몸 말리고, 저녁에 시 한 수 읊으면서(읊을 영詠) 집으로 돌아가는(돌아갈 귀歸) 것입니다.”


공자는 “자네의 생각이 나와 같다.”라고 답한다.


[p75, 고전의 대문, 박재희, 김영사 인용]


독락당의 계정溪亭과 자계紫溪



독락당 앞 개울가에 앉아서 영귀대를 바라보며 공자의 질문을 생각해본다. 나에게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이언적은 왜 독락당 건너편 바위에다가 공자의 이야기를 상징하는 ‘영귀대詠歸臺'를 새겨 놓은 것일까?


한국 정원을 여행하다 보면 ‘영귀詠歸'라는 말이 한두 번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함안의 무기연당, 서석지의 ‘영귀제' 등 조선의 선비들에게 공자의 질문과 증점의 대답은 많은 생각을 불러오는 것 같다. 이는 비단 조선의 선비만이 아닌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적용되는 질문과 답이다.


오징어게임이 한창일 때 만약 456억이 생기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 품었을 것이다. 코인으로 주변의 사람들이 거액의 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너도나도 큰돈이 생기면 어떤 인생을 살지 즐겁지만 허무하기 그지없는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공자와 같은 질문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공자의 질문과 증점의 대답은 뇌리에 남아 계속해서 생각하게 했다.


“나는 언젠가 세상이 알아주는 그날이 왔을 때 꿈을 펼칠 수 있는 준비가 된 삶을 살고 있는가?”


되뇐 질문은 시간이 흐르자 내 삶의 지표가 될만한 기준이 되었다.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목표라면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고 묵묵히 해나가면 되었다. 30대의 나는 길을 잃었고 그렇게 멈춘 듯 보이는 삶은 독락당 이언적의 정원에서 성실한 안식을 배웠다.






홀로 즐거운 집


경주 독락당獨樂堂은 독특한 민가이다. 보통의 민가는 대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가면 사랑채의 집주인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하지만 이 집의 이름이자 사랑채인 독락당은 꼭꼭 숨어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채를 둘러싼 행랑채가 나온다. 숨방채란 이름의 행랑채는 문이 두 개인데 왼쪽 문은 안채로 이어지고 오른쪽 문은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진다. 이 골목의 초입에는 독락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고 길고 좁은 골목만이 내게 허락된 동선이다.


독락당 평면도와 동선 / 1. 솟을대문
2. 행랑채 오른쪽 문 / 3. 골목 초입 독락당 진입문


3중의 문을 거쳐야 겨우 당도하는 독락당에서 철저한 차단을 느낀다. 이름도 ‘홀로 즐거운 집'이고 손님을 맞이해야 할 사랑채는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듯 몇 겹의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이렇게까지 분명한 의지를 밝혔는데도 내가 아직 여기 있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허락된 동선은 열린 문을 따라 걷다 보면 다시 밖으로 내쳐지는 좁은 골목길뿐이다.


좁은 골목과 독락당 살창


이언적의 가르침은 다정하지 않다.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영귀대 아래 흐르는 개울 물에 자신을 비춰 보라는 것 같다. 자연의 이치 속에서 깨우치고자 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정원에 인생의 표어를 하나씩 걸어놓고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리 멀지 않지만 가깝다고도 할 수 없는 양동마을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난 이언적은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의 가르침으로 과거에 급제한다. 독락당을 지은 것은 만 39세,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한 이유로 귀향을 당해서였다. 무슨 연유로 태어나 자란 동네에서 떨어져 이토록 차단된 집을 짓고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온전히 쉴 수 있는 사람의 정원은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살면서 길을 잃은 것 같을 때,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세상이 냉담하게 답해올 때, 독락당이 생각난다. 누군가의 위로보다는 나 홀로 내면의 힘을 키우고 싶을 때, 독락당 자계 암반에 앉아 물길을 보면 아무리 볼품없어 보일지라도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삶에서 지표가 될만한 질문과 답을 마음에 새기고 흔들림 없이 걷다 보면 어느 저물어가는 늦봄, 깨끗한 봄옷을 입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흥겨운 노래 부르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계紫溪




독락당에서 중앙정치로 복귀한 후 을사사화 때는 의금부판사가 된다. 사림들을 심판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이후 자신도 함께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언적이 정립한 성리학의 계보는 퇴계 이황이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자 조선 성리학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주리적 성리설의 시초가 된다. 훗날 이언적은 동방 5현(정여창, 조광조, 김굉필, 이언적, 이황)으로 칭송받아 현자라 이름 붙여졌으며 사후에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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