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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품고, 노을이 물든 정원

경복궁, 아미산 화계

by 월하랑

*화계花階란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뒤로 언덕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완경사지를 이룬 자리에 건물을 지어 놓으면 후면에 경사진 넓은 공간이 남게 되는 데 이곳에 여러층의 단을 쌓아 석계를 만들고 석계에 화목, 괴석, 석물 등을 도입하여 기능성과 심미성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하여 조성한 구조물을 말한다.

- 전통조경시설사전, 김영모, 동녘



경복궁 왕비의 정원


궁은 정원의 주인이 즐겼던 방식을 따라 해 보기 까다로운 곳이다. 대부분의 건축물은 진입이 금지되어 있고 또 높다. 아미산 화계의 주인인 왕비가 정원을 즐긴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청마루에 앉아 뒷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세 폭의 그림이 걸린 듯이 차 한잔을 곁들이며 감상하는 것. 둘째는 화계를 산책하는 것. 화계를 산책하는 것은 뒷마당으로 연결된 문이 굳게 닫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대청마루에서 감상하는 것은 얼추 따라 해 볼 수 있다. 물론 교태전 대청마루에는 오르지 못하지만 교태전 오른쪽에 딸린 건순각 옆 담장 가는 단이 높다. 건순각 옆 담장 문 앞에 서서 아미산 화계를 바라보자. 투어 할 때 꼭 이곳으로 사람들은 안내하는데 뒤돌아 보는 순간 모두들 탄성을 자아낸다.


건순각과 담장



정원 감상 시 중요한 것은 시선의 높낮이이다. 마치 영화에서 카메라 앵글을 부감으로 잡느냐, 앙각으로 잡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듯 정원도 마찬가지다. 항상 주인이 감상했을 방식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비슷한 곳이라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주인과 시선을 같이하는 것이 먼저, 그렇게 자리 잡은 곳에서 주인의 상황을 떠올려본다.


건순각 옆 담장 곁에 서면 왕비가 대청마루에 앉아 있을 때와 같은 눈높이가 된다. 왕비의 화계답게 온갖 화려한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굴뚝부터, 괴석, 연꽃 모양의 수조, 해시계를 놓던 앙부일구대까지 화려함의 극치이다. 이 화려함 속에 단아하게 자리 잡은 두 석조石槽에는 화계의 정서를 알려주는 단어가 적혀 있다.


함월지涵月池, 낙하담落霞潭

달을 품은 못, 노을이 물든 못


달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자연 점경물로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그릇에 물을 담아두고 두 손을 비비며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주문하듯 외웠다. 담아둔 그릇에는 달빛이 비췄고, 영롱한 달빛은 주문과 함께 신성한 기운을 불러왔다. 왕비는 달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달을 품은 못을 화계에 만들어 준 것은 어떤 소원이든 빌라는 왕의 선물같다. 하지만 돌수조에 담겨 있는 달을 보며 왕비는 '여기에 갇힌 걸 보니 영락없이 너와 나는 같은 신세로구나.'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누구든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해봤을 것이다. 그 순간의 색을 영원히 담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사진을 찍고 인스타에 올린다. 조선시대에는 카메라도 인스타도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을 담고 싶은 마음만 있었을 뿐이다. 어떻게든 아름다운 노을을 갖고자 하는 마음으로 노을이 물드는 못을 만들었다. 함월지와 낙하담. 한자지만 뜻도 발음도 어여쁜 저 두 글자 속에 어쩐지 슬픔이 엿보인다.








홀로 남겨진 둔덕



오래된 담장을 바라보고 있다. 담장을 바라보는 것은 그 안이 너무나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담장 안은 들어갈 수 없다. 이 담장의 문이 바로 화계의 닫힌 산책로이다. 화계 맨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어떤 시선이 눈에 담길지 상상해 볼 수는 있지만 꼭 한번 직접 담고 싶다. 왜냐면 이곳이 바로 조선의 시작이었으니까……


어딘가에 올라서서 주변을 바라볼 때 그 아름다움은 경관의 힘일까? 내가 서 있는 땅의 힘일까?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땅의 힘은 결국 그 땅을 밟고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의 힘을 말하는 것 같다. '풍수지리가 좋다.'는 말을 바꿔보자면, 멋진 풍광을 오랫동안 바라보는데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내 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누구든 그곳에 앉아 바라보는 것을 눈에 담다 보면 너그러운 마음과 생기가 돌게 될 것이다.


과연 아미산 화계에 올라가 바라보는 경치는 그럴까? 교태전 후원은 경복궁의 중심축이 시작되는 명당이니. 이는 마치 민가에서 경사지 아래에 안채를 두는 것과 같다. 혹은 전통 마을에서 마을의 주산이 땅과 만나는 곳에 종갓집을 놓고 아랫집들이 주변에 자리 잡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론 교태전이 안채의 역할을 하거나 경복궁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건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궁에는 궁만의 언어가 있다. 한국의 전통 공간에서 건축의 ‘자리(location)’는 가장 중요한 테마이고, 민가, 전통마을, 궁 모두 자리를 어디에 잡을지를 주요하게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북악산의 정기가 땅과 가장 강하게 만나는 곳에 경복궁의 중심축을 맡겼고 그 자리가 바로 교태전 아미산 화계라는 것은 단순한 정원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만든다.


경복궁 전도


하지만 이를 아는 이가 많지 않다. 모두들 아미산 화계는 경회루 연못을 판 흙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흙을 파다 둔덕을 만드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러한 예가 있다. 지금은 광화문이 사거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삼거리였다. 서울 시청으로 향하는 남쪽 길은 원래 없었다. 관악산에서 경복궁으로 향하는 기운이 너무 강해서 삼거리 남쪽에 흙을 쌓아 둔덕, 황토마루를 만들어 기운을 끊어냈다. 또 다른 예가 있다. 종묘는 죽은 왕들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게 앞이 잘 모아지는 형태여야 했다. 그런데 종묘 남쪽이 그런 형태가 아니라서 둔덕을 만들어 인위적으로 모이는 모습을 갖추었다. 기운을 돋운 것이다. 이렇게 둔덕은 기운을 끊어내거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조성한다.


경복궁의 북쪽은 본래 산자락 아래라서 기운이 모자라지 않다. 그렇다고 궁의 중심축에 굳이 둔덕을 만들어 기운을 끊어낼 필요도 없다. 그럼 이 둔덕의 정체는 무엇인가? 바로 둔덕이 아닌 산맥이다. 원래 있던 산자락에서 마지막 끝부분만을 남기고 뒷부분이 잘려나가 둔덕처럼 보인 것이다. 어쩌다 산맥이 둔덕으로 바뀐 것을 몰랐을까?


조선총독부 부지 평면도


교태전 뒤에 이어진 산자락이 잘려 나간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일제는 율곡로로 광화문과 육조거리를 끊어내고 이어 창덕궁과 이어져 있던 종묘를 관통하여 조선의 목을 치는 형세를 만든다.(근래 창경궁과 종묘 사이의 길을 지하화하는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다. 조선의 시작이 바로 교태전 뒤로 이어진 북악산임을 알기에 경복궁엔 볼거리가 없어서 일본 정원을 만들겠다며 땅을 평평하게 만들어 이도 끊어낸다. 결국 경복궁은 위도 잘려 나가고 아래도 잘려나간 형국이 된다. 일제의 전략이다.





교태전 뒤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의 기운은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다행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교태전을 왕비의 처소로 정하고 일반 민가에서 안채 뒤에 화계가 오듯 기존에 있던 산맥을 화계로 조성하여 왕비의 정원으로 삼았기에 살아남았다. 흥선대원군이 훗날 일제가 교태전 뒤를 없애버릴 것에 대비해한 일은 아니었지만 간발의 차(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로 북악산의 마지막 끝은 살아남았다.


경복궁은 하나부터 열까지 조선의 정신을 구현해 낸 건축물이다. 그러한 건축물의 축을 작은 둔덕에 맡겼을 리 없지 않나? 우리 스스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처참한 오해이다. 다행히도 2012년에 관련 논문*이 세상에 나와 이제라도 본래의 뜻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종묘의 목을 쳐낸 율곡로가 지하화 되고, 육조거리였던 광화문 광장의 축이 바로잡혔으니 이제 아미산의 정기를 북악산과 이을 때다.

(*경복궁 아미산의 조영과 조산설(造山說)에 관한 고찰 / 정우진․심우경 / 고려대학교 조경학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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