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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리더의 정원

대전 남간정사와 논산 명재고택

by 월하랑


여기 큰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정원과 작은 정원으로 세상에 큰 울림을 주는 정원이 있다. 대전의 남간정사와 논산의 명재고택은 스승과 제자에서 정적政適이 된 17세기 조선의 두 리더의 정원이다.




송시열의 남간정사


남간정사 (출처: wikimedia)


건물 아래로 물이 흐른다. 마치 건물이 물을 내뱉는 것 같다.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형태이다. 건물 아래를 관통하는 물 길. 흔히 집 아래 물이 흐르면 흉하다고 하는데 이렇게 과감한 형태는 무슨 의미일까? 송시열이 마지막 7년을 보낸 곳이 남간정사南澗精舍이다. 만 75세의 노인이 말년에 조성한 정원은 그가 평생 추구한 인생의 철학을 담았을 것이다.


암서재


1666년 괴산의 아름다운 계곡에 ‘암서재巖棲齋'를 지었다. 송시열이 지극히 따르는 중국의 주희朱熹가 무이산에 무이구곡*을 경영한 것을 따라 했다. 17년 후 노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공간을 조성하고 싶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남간정사이다.

*경치가 좋은 계곡의 물 길을 따라 9가지 이름을 붙이고 이상향의 공간을 만든 것


남간정사 평면도


대전시 소제동에 있던 기국정杞菊亭이 갈 곳을 잃어 어쩔 수 없이 남간정사 아래로 들어오기 전에는 훨씬 탁 트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당의 모습도 한쪽이 찌그러진 모습이지만 원형은 마당을 가득 채우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당 한쪽을 메우고 남간정사 정면의 시야를 일부 가려 아쉽지만 송시열이 남간정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건물 아래를 관통하는 물길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건축 양식의 의도는 무엇일까?


옥류각 (출처: 문화재청)


이와 비슷한 건물이 두 개가 있다. 모두 남간정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모두 송시열과 가까운 사이이다. 대전 동구의 옥류각은 송시열의 사촌 송준길이 죽고 난 후 제자들이 건립한 것으로 건물 아래 계류가 관통하는 형태이다. 또 하나는 송시열의 외손자 권이진의 유회당 별업으로 작은 정자 아래 가느다란 물길을 만들어 지나가게 하였다. 송시열과 가까운 사람들이 남간정사를 따라한 것은 건물 아래를 지나는 물길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물길의 의미를 밝혀낸 연구는 없었다. 남간정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기둥에 주련柱聯*이 있었고 답은 눈앞에 있었다. *기둥이나 벽면에 세로로 써붙이는 문구


危石下崢嶸 위석하쟁영 / 위태로운 돌이 가파르고 험한 모습으로 아래를 향하고
高林上蒼翠 고림상창취 / 높은 숲 푸르게 우거지며 위를 향한다.
中有橫飛泉 중유횡비천 /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물로
崩奔雜綺麗 붕분잡기려 / 모든 것이 무너지듯 뒤섞이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 운곡남간(雲谷南澗) ‘주자’-



아래를 향하는 돌과 위를 향하는 나무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물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자 무너지듯 뒤섞이며 조화를 이룬다. 주자의 시는 흐르는 물을 통해 주자가 생각하는 성리학 즉,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우주 만물을 교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송시열은 말년의 정원 이름을 ‘운곡남간'에서 따와 ‘남간정사'라 짓고 정사 아래로 흐르는 물과 시에서의 물이 서로 겹쳐지며 송시열의 자리 밑으로 진정한 성리학의 가르침이 흘러나오는 듯한 모습이다.


송시열의 주자를 향한 열정을 지금으로 치자면 BTS의 ARMY에 견줄 수 있을까? 이런 표현이 웃길 수도 있지만 단순히 따르는 학자 이상으로 신격화된 존재, 절대적인 존재로 주희를 대하는 모습에 이 정도의 표현이 와닿을 정도다. 윤휴라는 학자가 주희의 성리학을 새롭게 해석한 책을 내놓자 송시열은 맹렬히 비난하며 자신의 분노에 동조하지 않는 친구와는 절연을 외칠 정도였다. 송시열에게 주희는 절대적 진리 그 자체였다.





윤증의 명재고택


윤휴의 새로운 해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윤선거는 송시열의 분노를 샀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총명한 아들 윤증을 친분이 두터운 송시열에게 맡겼다. 하지만 윤휴에 대한 평가로 틀어진 관계는 윤선거가 죽고 나서도 회복되지 못했고 이를 알지 못하는 윤증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인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한다. 무성의하고 비판적인 내용의 묘갈명을 받아 든 윤증은 화가 나 송시열의 독단적인 성격과 주자에게 맹목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친구에게 보내게 되고 이것을 송시열이 알게 되면서 조선의 당파는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윤증의 가족은 대의에는 대쪽 같았고 학문적으로는 깨어 있었다. 어머니는 병자호란의 패망 소식에 자결한 충신이었고 윤증의 할아버지는 노쇠한 몸으로 패망의 책임을 떠안고 스스로 유배길에 올라 결국 돌아가신다. 부인은 대의를 위해 자결했음에도 병약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죽지 못한 것을 평생 자책하며 관직을 마다하고 산중에 은거한 윤증의 아버지는 속한 당파와 상관없이 배울 점이 있다면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대문과 담장 없이 탁 트인 명재고택


윤증 역시 관직을 마다하고 평생을 단출하게 살았다. 하지만 모두가 따르는 시대의 스승 윤증이 노쇄하자 제자들이 나서서 집을 마련한 것이 명재고택明齋古宅이다. 명재고택의 대문이 원래 없었는지, 전해져 오다가 담장과 함께 모두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사랑채가 어떠한 막힘도 없이 노출되어 있다. 다른 건물과 담장은 잘 보존되어 있지만 유독 사랑채 앞의 담장과 대문이 없는 이유는 원래부터 없었거나 만약 있었더래도 별 의미가 없었기에 지금처럼 된 것이라 생각한다.


명재고택 사랑채와 두 단의 기단


명재고택의 사랑채 누마루 옆 기단 위에 올라서서 윤증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사랑채에서 꽤 떨어진 어머니를 기리는 열녀각에서부터 인지하지 못한 나지막한 경사가 건물 앞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또 두 개의 단 위를 오르니 사랑채에서 마을이 잔잔히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 농사짓고 있는 농부의 사정을 훤히 볼 수 있는 시야다.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는 아무것도 없이 비워져 있다. 본래 사랑채 앞에는 집주인의 철학을 표현하는 정원이 있기 마련인데 마당은 비워져 있다. 그저 발아래 작은 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니 작은 돌들 사이로 큰 산맥이 보이고 앞에 고여있는 작은 웅덩이는 호수가 된다. 문득 무릉도원武陵桃源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어부가 산 사이로 정신없이 물고기 떼를 따라 들어가 빛이 나오는 동굴을 발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 작은 돌로 무릉도원을 느끼다니 지나친 해석인가 하며 고개를 든다. 사랑채 옆면에는 초록색 글씨로 ‘도원인가'라 적혀있다.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이란 뜻이다.


명재고택 사랑채의 석가산石假山* *돌로 만든 가상의 산


옆 면에 초록색 글씨로 '도원인가'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시대의 어른이자 모두가 존경한 스승인 윤증의 정원은 이토록 소박하다. 너른 공간이 있어도 본인은 이 작은 석가산으로 무릉도원을 가졌으니 나머지는 모두 당신들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 같다. 실제로 사랑채 기단에 올라서 있는 동안 나는 명재고택 옆의 향교로 등교하며 인사하는 어린이들, 마을에 문제가 생겨 조언을 구하고자 모여든 주민들, 나라에 주요한 일이 생겨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전국에서 모여든 선비들과 휏불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간 두 리더의 정원은 이토록 달랐다. 평소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며 해야할 말을 아끼지 않았던 송시열의 정원은 그를 닮았고, 조용히 남의 말을 경청하며 다른 이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던 윤증의 정원 역시 그를 닮았다. 모르는 사이 나를 닮았을 내 공간을 돌아보며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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