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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품없지만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은

담양 소쇄원

by 월하랑

비 오는 차 안, 그치기를 기다릴 겸 연속된 답사로 지친 눈을 감았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세차지는 빗줄기에 이대로 오늘 답사를 접을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눈앞을 가릴 정도의 비가 아니라면 사진을 찍고 정원을 돌아다니는 것에 문제는 없다. 카메라와 얼굴을 감싸고 소쇄원으로 향했다. 대나무 숲 아래 오리들이 놀고 있었다. 함께 비를 맞아주어 고마웠다. 숲을 지나니 물소리 가득한 소쇄원이 있었다. 정원에서 바뀌는 날씨, 계절, 시간은 정원의 옷장이다. 같은 정원도 어떤 계절과 시간대, 날씨에 가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마치 옷을 갈아입듯이 계절마다, 날씨마다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정원을 방문하기 가장 좋은 때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날의 정원이 가진 매력을 찾아 즐기는 것은 방문자의 몫이다.


한국 최고의 정원이라 불리는 소쇄원 방문에 부담이 앞섰다. 정원이 가진 너무 많은 언어들을 다 소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이었다. 조선 중기 최고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가 남긴 소쇄원 48 영시는 방대하다. 소쇄원 지도라고 할 수 있는 목판본 그림 역시 현존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 정원의 주요 요소들이 빼곡하다. 그 밖에도 소쇄원에 대한 논문과 단행본들이 넘친다. 다른 정원보다 훨씬 복잡한 공간 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뜯어보아야 했다.


소쇄원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많은 문헌자료가 남아 있기도 하고, 16세기 초반의 오래된 정원임에도 원형이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 정원사적으로 의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계에서 특별히 여겨지는 것으로는 모든 이의 공감을 얻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도 다른 정원보다 특별하게 느껴지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나에게 소쇄원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배롱나무의 자미紫薇와 여울을 뜻하는 탄灘을 합쳐 이름도 예쁜 자미탄이라 불렸던 물가 주변에는 호남 가사문학을 이끌었던 이들의 정자 수십 개가 즐비해 있었다. 관동별곡을 지은 정철의 송강정,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순의 면앙정을 비롯해 식영정, 환벽당 등은 소쇄원과 함께 자미탄을 수놓았던 정자들이다. 이렇게 많은 정원이 모여 있던 이유는 주변의 풍광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전국을 답사하면서 봤던 수많은 경치 가운데 전라남도 화순의 시골길이 기억에 남는다.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순에 들어서는 순간 문학작품에서나 들어봤던 경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겹다는 진부한 표현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그날의 경관을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좋겠다. 이따금 방문할 뿐인 나도 이런데 나고 자란 사람들은 오죽했을까란 생각을 하며 수많은 정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이해해 보았다.


소쇄원은 정원을 함께 즐기는 문화가 있던 곳에 만들어졌다. 양산보는 다른 정원들의 주인과 달리 그리 유명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 그가 만든 정원이 우리나라에서 최고라 여겨지게 된 것은 한 명의 뛰어난 천재보다 집단 지성이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양산보는 정원을 만들며 주변 많은 지인들이 해주는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주인인 자신보다 이곳을 방문할 손님들을 위해 공들여 만들었다. 소쇄원은 주인보다 손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정원이라 특별하다.


소쇄원에는 주요 건물이 3개가 있다. 하나는 주인의 거처지인 제월당이다. 가장 깊숙하고 높은 곳에 있는 제월당에서는 정원의 핵심경관인 계류를 볼 수 없다. 제월당의 시선은 계류가 아닌 들어오는 손님을 향하고 있다. 나머지 두 건물은 계류가에 있어 감상하기 좋다. 소쇄원에서 가장 큰 건축물인 광풍각은 특별 손님을 위해 만든 게스트룸이다. 각별한 손님이 놀러 오시면 편히 머물고 오래 지내다 가실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준비해 놓았다. 마지막 건물은 대봉대 위의 초정이다. 작지만 이곳에서 보는 경치가 가장 좋다. 초정 주변에는 정원에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밀집시켜 놓았다. 소쇄원의 시원한 폭포가 가장 잘 보이고, 계류의 물이 오래된 대나무 통으로 지나 들어오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모인 물에는 물고기가 살아서 낚시도 하고 밥을 주기도 했다. 지금은 없지만 초정 옆으로 새장이 있어 지저귀는 새도 구경할 수 있었고, 지당의 물이 물레방아를 지나는 모습도 연출해 놓았었다. 초정 바로 앞에서는 거문고를 연주할 수 있는 무대도 있었고, 계류 건너편에서는 바둑을 두곤 했는데 바둑판 역할을 하던 바둑 바위는 지금도 남아있다. 초정 아래 어딘가에서는 폭포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프로그램을 대봉대 주변에 만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대봉대는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초정 바로 뒤에는 지금도 벽오동이 있다. 봉황은 뛰어나게 잘난 사람을 상징한다. 그리고 봉황은 오직 벽오동 위에만 내려앉는다고 전해진다. 소쇄원 주변에는 유독 대나무가 많다. 담양이 워낙 대나무로 유명하지만 소쇄원 48 영시를 읽어보면 대나무를 일부러 곳곳에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황은 대나무에 맺힌 이슬만 먹고 산다고 해서 이곳을 방문한 봉황이 부디 오래 머물다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소쇄원이 주인 자신 보다도 손님을 위해 만든 공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대목은 바로 제월당과 광풍각의 이름이다. 황정견의 시 구절에서 따온 제월과 광풍은 맑게 갠 날씨에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을 의미한다. 이 시는 친구 주렴계를 떠올리며 지은 것이다. 황정견은 주렴계의 인품과 생각이 마치 비가 그치고 맑게 갠 날 부는 바람과 밝은 달처럼 개운하고 깨끗했다고 읊었다(庭堅稱 基人品甚高 胸懷灑落 如光風霽月정견칭 기인품신고 흉회쇄락 여광풍제월). 특히 황정견 시의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와닿는다. 아마 양산보도 마지막 구절을 읽으며 주렴계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드물게 볼품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와 상관없이 친구들은 그와 오랫동안 함께 있기를 좋아했다. 陋於希世而尙友千古 루어희세이상우천고 (출처: 송서宋書 주돈이전편周敦頤傳篇, 황정견黃庭堅, 작가 재해석)


'볼품없다'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주렴계와 오랫동안 함께 있고자 하는 이유가 그에게서 얻어낼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채워지기 때문이었다는 뜻 같다. 양산보도 그런 주렴계를 닮고 싶어 주요 건물 두 채의 이름을 제월당과 광풍각으로 지었을 것이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봉황과 같은 친구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만든 정원의 이름에 잘 어울린다.



울창한 대나무 숲 사이로 좁은 오솔길을 따라 소쇄원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고요한 공간은 긴장감과 기대감을 일으켰다. 갑자기 밝은 빛과 시원한 물줄기가 눈앞에 쏟아졌다. 마치 공연 전 암전을 통해 집중도를 높였다가 극이 시작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었다. 소쇄원의 핵심 경관은 계류이다. 그런데 계류 바로 옆에 지당이 하나도 아닌 두 개가 있다. 굳이 자연 계류가 있는데 바로 옆에 인공 지당을 두 개나 조성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담장의 건축이라고도 불리는 소쇄원의 담장의 시작 지점이 이상했다. 아래쪽 지당은 노출시킨 채 담장이 시작되었다. 계류를 두고 담장을 두 개나 만든 것도 의아한데, 하나는 담장으로 가리지 않고 마치 여기는 소쇄원 영역이 아닌 것처럼 오픈시켜 놨다. 그러고 보면 소쇄원 담장도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담장의 역할은 수행하지 못한다. 하나로 이어지지 않고 사방이 뚫려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계류 쪽 담장은 물이 잘 흐를 수 있도록 공중에 띄웠다. 성인도 마음만 먹으면 그 아래로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다.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의 담장도 독특하다. 쭉 내려가도 되는데 굳이 광풍각 뒤를 두 번 돌았다가 내려간다. 지당을 만드는 것, 담장을 돌아 돌아 만드는 것 모두 돈이 많이 든다.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설계했을 리는 없다.


지당이 두 개인 이유는 서로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초정 바로 옆의 작은 지당은 오락이 목적이다. 물고기를 감상하고, 낚시하고, 먹이를 주는 등이다. 아래 지당은 크기도 훨씬 크고 저수의 기능을 담당한다. 원래 계류의 물을 사용하던 마을 사람들과 나무꾼들을 위해 만들었다. 계류를 사유화하여 물을 쓰지 못하게 된 이들에게 대신 지당의 물을 편하게 쓸 수 있게 한 것이다. 지당이 끝나는 지점에서 담장이 시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제월당은 집주인이, 광풍각은 손님이 머무는 곳이다. 두 건물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외부로부터의 시선 차단을 위한 담장과 두 건물 사이의 담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장 간단한 방법은 건물 왼쪽에 일자로 담장을 만든 후,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 파티션처럼 짧은 담장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소쇄원의 담장은 왼쪽 아래로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뒤 다시 아래로 내려오고 광풍각 뒤를 지나 또다시 왼쪽으로 내려오는 구조다. 굳이 광풍각 뒤에 두 겹의 담장을 만들었다. 기왕 두 겹의 담장을 만들어 생긴 광풍각과 제월당 사이 공간을 좀 더 키웠다면 작은 정원공간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광풍각의 크기만큼만 두 겹으로 만들어진 담장의 의도는 간단한 담장 배치와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광풍각 뒤에 파티션처럼 담장을 만든다면 시선차단의 효과는 동일하다. 동선도 단순하다. 광풍각 뒤로 난 계단을 올라 문을 두드리면 된다. 지금은 광풍각 앞으로 나와 왼쪽 담장을 지난 후 계단을 오르고 오른쪽으로 꺾은 후에 문을 두드린다. 동선의 차이는 시간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담장을 두 겹으로 만들어 동선을 길게 한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것이다. 광풍각의 담장이 더 길지 않고 딱 광풍각 오른쪽 기둥과 거의 비슷한 길이로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제월당에서 광풍각은 담장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제월당 마루에 있으면 신을 신기 위해 나온 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손님이 채비를 하고 제월당으로 올라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주인은 주변 정돈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분주해지거나 민망해지지 않으면서 서로를 맞이할 수 있다. 제월당 광풍각 사이의 담장이 네 번 꺾여 돌아가게 만든 이유가 사려 깊다.


그날 이후 일행과 함께 또 한 번 소쇄원에 갔었다. 화창한 날씨에 노랗게 핀 창포가 정원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어줬다. 비가 오는 날은 혼자라 좋았고, 화창한 날엔 함께라서 좋았다. 제월당 앞에는 매화나무가 있다. 소쇄원의 밤이 어떨지 궁금하다. 밝은 달과 함께 매화나무 꽃봉오리 맺힌 초봄의 하늘을 보고 싶다. 어울리는 음악을 틀어놓고 창 밖에 걸린 매화나무 가지를 보며 잠들고 싶다. 다음날 새벽 물안개 낀 소쇄원에서 눈 뜨고 싶다. 동트기 전 새벽의 하늘 아래서 온전히 소쇄원과 하나 되고 싶다. 그렇게 소쇄원의 모든 장면을 마음속에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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