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독락당獨樂堂
간절히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면 원하는 글씨가 나올 때까지 정성을 다 해 적어 벽에 붙여두었다. 그렇게 하면 어려워 보이던 목표도 이뤄지곤 했었다. 이제는 무엇인가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벽에 적혀 있는 글귀를 보며 두근대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여전히 간절히 바라는 것을 글로 적어두고 매일 같이 바라보는 것의 힘을 믿는다. 경주의 독락당은 계류를 끼고 있는 민가이다. 일반적으로 경치 좋은 계류가에는 정자를 만들곤 하는데, 독락당은 집을 지었다. 아주 빼어난 경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계류가 크지 않고 집 건너편은 울창한 숲인 데다 가파르지 않은 지형이라 마치 독락당에 속해 있는 것 같다. 자계紫溪라고도 불리는 계류에는 여러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독락당의 주인인 이언적이 새겨 넣은 글들은 아마도 그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혹은 이루고 싶은 꿈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집 건너편에 두고 자주 바라보았을 글귀는 영귀대이다. ‘영귀’라는 단어는 독락당뿐 아니라 한국 정원 곳곳에서 등장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 단어를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영귀’의 이야기가 선뜻 이해되지는 않는다.
‘영귀詠歸’는 공자 이야기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어느 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면 무얼 하겠냐고 묻는다. 제자들은 그럴듯한 대답을 한다. 백성들이 모두 풍족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거나 군사력을 강화해 강인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답들이다. 그중 한 명의 답에 영귀가 등장한다. 읊을 영, 돌아갈 귀의 영귀는 저녁에 시를 한 수 읊으며 친구들과 함께 손잡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공자는 이 대답에 ‘자네의 생각이 나와 같다.’고 한다. 다른 제자들의 답에는 꼭 이루길 바란다며 응원을 하던 공자가 포부를 묻는 질문과 거리가 먼듯한 대답에는 같은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의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오랫동안 곱씹어 보았다.
독락당은 불친절한 집이다. 손님을 맞는 게 싫다는 것을 분명히 표현한다. 보통의 민가는 대문을 열면 사랑채의 누마루가 손님을 맞이한다. 어떤 건물보다 돋보이고 멋지게 짓는 것이 사랑채이다. 이와 반대로 독락당은 안채보다 더 꽁꽁 숨어있다. 다른 사랑채보다 더 많은 문을 통과해야지만 도달할 수 있고, 사랑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은 아예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겼다. 두 번째 문을 열었을 때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벽을 ‘ㄱ’ 자형으로 방향을 틀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독락'을 홀로 즐거운 집으로 해석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것이 홀로 즐거운 것이었다. ‘홀로 즐거움을 즐기는 것보다 남과 함께 즐거움을 즐기는 것이 낫고, 적은 사람들과 즐거움을 즐기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즐거움을 즐기는 것이 낫다.’는 맹자의 말에서 홀로 독, 즐길 락을 따 온 것이다. 독락당에서의 이언적은 귀향을 당한 처지였지만 자신을 비롯한 중앙 관리들의 혼란스러운 정치로 피해 입는 백성들을 걱정했다. 정계에 진출하며 직책을 맡았음에도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구할 능력이 되지 않는 자신을 한탄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울 수 없고, 홀로 즐거운 ‘독락’이나 한다며 자책하는 뜻에 독락당이라 이름 지었다. 그가 이 집에 꽁꽁 숨고 있었던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집 앞을 흐르는 물길도 편하게 보지 않았다. 사랑채의 가장 좁은 문을 통하고 담장에 난 창을 통해서 바라보았다. 즐거움과 거리가 먼 스스로를 가둬둔 듯한 구조였다. 사랑채의 마당 한 구석에는 정원이라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약쑥밭을 만들었다. 손님을 초대하기에 적당한 사랑채의 누마루는 확실히 아니다. 그는 이곳에서 작은 창을 통해 자계를 내려다보며 약쑥밭을 가꾸었다. 문이 닫혀 살창을 통해 반대로 안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어 독락당에서의 분위기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는 퇴계 이황이 스승이라 여겼으며 동방의 현자로 부릴 정도로 영향력이 큰 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공간은 작은 수행처처럼 세상과 단절된 듯했다.
공자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막상 대답하려니 막막했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정작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무엇을 이룬 들 그것으로 끝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느 저물어가는 늦봄, 깨끗한 봄옷 갈아입고, 좋아하는 친구 대여섯 명과 어린아이 예닐곱 명과 물가에서 멱 감고, 정자에서 바람에 몸 말리고, 저녁에 시 한 수 읊으면서 함께 손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 꿈은 없었다.
독락당 앞의 아름다운 자계는 흐르고 흘러 옥산서원 앞을 지난다. 이언적이 죽은 후 제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옥산서원은 독특하게도 안을 관통하는 물길이 있다. 자계의 물을 끌어들여 서원에 흐르게 한 것은 분명한 상징성을 가질 것이다. 말년에 사랑채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옥산정사로도 불렸던 독락당을 이제는 옥산서원이 이어간다. 그렇게 독락당과 옥사서원을 잇는 자계의 물은 이언적의 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콘크리트 옹벽으로 가로막혀 자계의 물이 서원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계류의 바닥까지 보이는 깨끗하고 투명한 물길은 서원 앞에서 용추 폭포란 이름으로 시원하게 떨어진다. 곱씹던 질문은 오히려 삶의 지표가 되어 주었다. 언젠가 꿈을 펼칠 수 있는 때가 왔을 때 준비 된 삶을 사는 것, 함께 손잡고 즐거워할 친구들과 아이들이 있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알고 고요히 흐르는 물에 자신을 투영할 줄 아는 집, 독락당이 주는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