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일두고택一蠹古宅 / 남원 몽심재夢心齋
함안 일두고택
쌓이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지는 언제나 관심 있는 화두다. 운동을 하거나, 영화를 보고, 때로는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속이 풀린다. 그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집 구조 바꾸기다. 집은 공간에 대해 생각하기 좋아하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장소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책상의 위치가 중요하다. 앞이 벽으로 막혀 있지 않은 넓은 책상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일하는 것을 좋아해 거실에 큰 책상을 두 개나 두었다. 'ㄱ'자, 혹은 'ㅁ'자로 책상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본다. 높은 지대에 있는 집이라 빌딩 숲 사이로 관악산이 보인다. 모니터 옆의 관악산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어본다. 매일 눈에 담는 풍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정원을 공부하면서 갖게 되었다. 창을 통해 무엇을 보는지에 따라 주인의 삶의 태도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는 함안의 일두고택이 등장한다. 늠름한 소나무와 추가 기둥으로 지붕을 받칠 만큼 웅장한 누마루는 누가 봐도 대감집처럼 보인다. 위풍당당한 사랑채와 정원이 잘 꾸며져 있어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 있다. 함안의 일두고택은 이상적인 대감집의 전형이다. 누마루 바로 앞의 커다란 소나무가 전체 분위기를 잡아준다. 높이 솟지 않고 옆으로 꺾여 펼쳐지는 모습이 당당하고, 쉽게 다가가기 힘든 어르신처럼 느껴진다. 이 집의 주인 정여창은 퇴계 이황과 함께 동방의 현자로 불렸다. 조선시대를 통 틀어 현명한 사람 18명을 성균관 문묘에 모시는데, 정여창이 그중 한 명이다. 조선 초를 살다 간 그의 고택은 16~18세기를 거쳐 1860년대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정여창 당대의 모습은 아니지만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위상이 그대로 남아있다. 대문에 무심히 걸려 있는 정려패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훈장과 같은 것이다. 나라에서 인정한 충신, 혹은 열녀와 같은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것인데 하나도 아닌 무려 다섯 개나 있다. 정려패를 하나만 받아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 비각을 만들어 보관하는 것이 보통인데, 하도 많아 대문에 무심히 걸려 있는 정려패에서 위용이 느껴진다.
고택이라 불리는 조선의 민가에는 핵심 건축들이 있다. 하인이 지내며 창고이기도 한 행랑채, 바깥 주인이 머물고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 안주인이 기거하고 부엌이 있는 안채, 그리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는 별당채이다. 이런 건축물을 각기 어떤 크기로, 어떻게 배치시킬지는 집집마다 다르다. 건물 간의 관계 속에서 가문의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일두고택 안채에는 아래채가 있다. 보통은 장성한 처녀나 결혼한 자식들이 생활하는 곳인데, 일두고택의 아래채에는 하동 정 씨 일가 중 가난한 집 여식들을 데리고 와서 교육시키며 돌봤다고 한다. 사랑채에서 제자들을 양성했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안채에서 여성 교육을 한 사례는 많지 않다. 집안의 어르신을 모시는 별당채는 보통 안채 가까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어른을 모시는 것은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두고택의 별당채는 사랑채 옆에 있다. 아마도 이미 안주인이 돌보고,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 많아 노인을 모시는 일까지 맡기엔 벅찼기 때문인 듯하다.
일두고택의 정원은 본격적이다. 담장이 배경이 되어서 마치 그림에 좋은 액자를 씌운 것처럼 품격을 높였다.
별당채와 사랑채 영역을 분리하기 위해 조성된 담장은 문으로 막혀있지 않고 중간에서 덩그러니 끝난다. 이런 담장을 차면담遮面墻이라고 한다. 얼굴을 가려주는 담장이라는 뜻이다. 차면담이 꼭 필요한 이유는 손님맞이를 하는 사랑채 때문이다. 차면담이 없다면 대문 열고 들어오는 손님에게 별당채가 그대로 노출되어 불편했을 것이다. 별당채가 사랑채 안쪽, 안채 옆으로 배치되는 이유도 불편한 노출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일두고택의 별당채는 사랑채 옆에 있으면서 함께 정원을 공유한다. 정원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의 아들과 별당채의 부모님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다. 일두고택의 화려한 사랑마당의 정원은 별당채로 진행될 시선을 가로막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다. 위풍당당해 보이는 정원이 사실은 부모님을 가까이 두고 모시려는 효심이 지극한 정원이었다.
남원 몽심재
누마루에 앉아 볼 수 있는 고택이라면 여유를 가지고 머물러본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이곳에 앉았던 주인과 소통해 보려 애쓴다. 남원의 몽심재를 방문했을 때, 누마루가 열려 있어서 얼른 앉아 보았다. 고택에는 누가 살고 있는 듯했다. 주인 없는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은 실례이지만, 문화유산은 공개해야 한다는 법 조항을 핑계로 허락도 없이 발을 안으로 들였다.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전망에 집중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보통 탁 트인 전망을 가지고 있는 여느 사랑채와 달리 바로 앞 언덕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이 정도로 가까운 언덕이 있으면 집 터를 다시 잡을 법도 한데 의아했다. 대문에서 사랑채까지 상당한 경사가 있는 것은 바로 앞 언덕 때문이었다. 풍수지리에서는 땅의 기운, 지기를 돋우기 위해 단을 높이라고 표현한다. 현실적으로는 마당과 집에 햇빛을 들이려다 보니 경사가 생기는 것이다. 언덕 말고 눈에 띄는 것은 큰 바위다. 대문 바로 앞에 있는 큰 바위는 원래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의도적으로 옮겨다 놓은 듯했다. 큰 바위를 유심히 보다 뒤의 누마루가 보였다. 누마루는 휴식을 취하며 무엇인가를 감상하는 건축물이다. 그런데 행랑채가 있는 곳에서 누마루가 보였다. 하인들이 지내는 행랑채에는 누마루를 만들지 않는다. 바위로 절묘하게 가려져 있는 행랑채 누마루를 확인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누마루 앞에는 연못이 있었다. 정원을 즐기기 위해 만든 누마루인 것이 확실했다. 네모 반듯한 지당은 규모는 작지만 정갈했다. 그렇다고 아주 작은 크기도 아니었다. 안채에서 지당으로 바로 이어지는 계단도 있었다. 아마도 부엌에서 필요한 물을 긷거나, 빨래도 했을 것 같았다. 안채랑 연결된 동선이 있으니 실생활에 사용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정원의 주인이 묘연했다. 처음에는 주인이 사용하는 두 번째 누마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마루에서 행랑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는 것을 보고 하인을 위한 정원인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랑채 누마루에서 보이던 큰 바위는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시선을 가려준 것이었다. 행랑 누마루에는 현판까지 있었다. 낙낙정樂樂亭이라는 현판은 거창한 뜻 없이 그저 즐거우라는 단순한 뜻이었다. 난간도 간단하게나마 장식해 구색을 맞추었다. 누마루에 앉은 하인이 빨래를 하는 아낙과 이런저런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는 소리를 들으며 흐뭇해하는 주인을 상상해 보았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있는 하인을 위한 정원을 보고 충격과 감동을 받은 내게 몽심재를 관리하시는 분이 오셨다. 인사를 드리고 확인을 위해 여쭤보았다. 위치 상 하인을 위한 정원인데 혹시 맞느냐는 질문에 관리인께서는 고택의 유래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몽심재는 18세기 후반, 박연당이 지었다. 그의 손자 박해창은 남원의 3대 만석꾼이라 불릴 정도로 재산이 많았다. 소작인에게 후했던 그는 명망이 높았고, 그가 죽자 영호남 여러 지역에 그를 기리는 유혜비가 세워졌다. 그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었다. 박해창의 아들 박장식은 서울 법대의 전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나왔다. 베풀며 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을 만나며 원불교에 귀의했다. 출가한 그는 원불교의 헌법인 ‘교헌’을 제정하고, 몽심재의 옆 건물을 원불교 교당으로 개조했다. 몽심재도 원불교에 기증됐다. 내가 만난 관리인은 원불교 교무셨다. 고택 이야기를 듣자 하인의 정원을 만든 주인의 마음이 읽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해가 저물어갔다. 나누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숙소를 정하지 못해 더 늦기 전에 이만 가봐야겠다고 하니 불쑥 몽심재에서 자고 가라고 하셨다. 쌀쌀한 날씨에 난방은 되는지, 씻을 곳은 있는지 고민되었지만 유서 깊은 고택에서 잘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다른 고택들과 마찬가지로 관리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시던 교무님은 이젠 몽심재를 떠나셨다. 원하던 원치 않던 발령받는 곳으로 순환하며 근무하는 것이라고 한다. 쫓겨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고택을 감상했던 내게 오히려 빵이며 과일이며 가진 것을 내주시던 교무님의 친절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인을 위해 정원을 만든 주인의 이타적 삶은 몽심재에 그대로다.
두 고택 모두 창을 통해 지키고 싶은 누군가를 바라보며 그들이 행복하길 바랐다. 정원은 그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였다. 정원의 꽃과 나무는 이야깃거리가 되어주었고, 함께 모여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고택의 주인이 매일 눈에 담았던 풍경은 아끼는 이들의 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