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원 여행 어때요?

석파정, 성북동 별서, 옥호정

by 월하랑

일본의 교토, 중국의 쑤저우는 정원 테마 여행에 최적화된 도시다. 한 숙소에서 여러 정원을 방문하기도 좋고, 맛있는 먹거리와 즐길 것이 다양해 해외 여행객뿐 아니라 자국민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유서 깊고 매력적인 거리, 아름다운 정원들이 모여서 정원 여행하기 좋은 도시가 한국에도 있다. 바로 서울이다. 볼 것, 즐길 것 많은 서울을 굳이 정원을 테마로 여행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원여행을 하기 가장 좋은 도시는 단연 서울이다.



석파정


서울미술관 옥상에는 석파정이 있다. 지금은 미술관을 통과해서 입장하지만 원래는 남쪽에 있는 대문으로 들어와 낮은 언덕 아래 계류를 끼고 올라가는 곳이다. 북쪽에는 커다란 암석과 건축물이, 서남쪽으로는 자연의 계류와 정원이 있는 석파정은 우리가 잘 아는 흥선대원군 소유의 별장이다. 이곳을 무척 아꼈는지 흥선대원군은 호를 석파로 지을 정도였다. 석파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랑채 바로 옆 소나무다. 위로 높이 솟지 않고 옆으로 넓은 소나무가 덮는 면적은 3칸 사랑채의 두 배 정도다. 나무를 받치고 있는 9개의 지주대가 무게를 실감 나게 한다. 옆으로 자라는 소나무가 이 정도로 크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오랫동안 공들여 키웠기 때문일 것이다. 소나무를 보니 서로 갖겠다고 싸울만하다. 석파정의 원래 주인인 김흥근은 흥선대원군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결국은 지고 말았다. 석파 이하응이 갖고 싶었던 것은 석파정이라는 건축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좋은 건축물은 얼마든지 지을 수 있지만 이곳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것이 탐났을 것이다. 소나무와 함께 석파정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요소는 바로 암석이다. 소나무 바로 뒤의 암석과 거대한 암벽은 지금도 명소다. 인왕제색도에 등장하는 바위와 비슷한 모습의 웅장한 암벽이 집 바로 뒤에 있는 것이 생경하다. 석파정은 인왕산 북동쪽 아래에 있어 바로 앞으로 북악산이 보인다. 서울미술관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다. 좋은 전망, 웅장한 바위, 큰 나무, 자연 계류가 있는 모든 것을 갖춘 별장이다.



성북동 별서


그런 날을 상상해 본다. 성북동 별서가 일반에게 공개되어서 한국 정원이 재조명받는 날을.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정원들은 일반인들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점들을 나름의 해석을 실어 흥미롭게 느껴지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성북동 별서에 특별한 해석이 있지는 않다. 정원 내면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있다거나, 다른 정원들처럼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정원에서 보낸 시간이 워낙 짧아서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원보다 잘 설명해보고 싶다. 성락원이었던 명승이 취소되었다가 다시 성북동 별서라는 이름으로 재지정되는 과정이 만든 불명예와 상관없는 정원 본연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매력을 말하고 싶다. 한때 한국 3대 정원이라면서 회자되었던 성락원이 거짓 정보로 지정된 명승임을 명석한 기자가 찾아냈다. 성락원이라는 이름도, 주인이라는 심상응도 존재하지 않는 정보였다. 공개되지 않던 정원이 개방을 준비하다가 밝혀진 사실이었다. 거짓 정보로 국가유산이 지정된 사실에 놀랐지만, 그렇다고 정원의 미적 가치가 거짓인 것은 아니었다. 정보의 오류가 정원이 가진 가치에 먹칠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성북동 별서에서 느꼈던 감흥이 담긴 메시지가 아니라 순수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정보를 꾸며낸 연구진에 화가 날 뿐, 정원 자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었다. 오히려 훌륭한 아래쪽 정원에 비해 위쪽 송석정 주위가 조악했던 것이 납득되었다. 첫 명승 지정 직후 진행된 공사로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멀어진 위쪽 부분을 제외하고 대문에서부터 송석정 아래까지는 그 어떤 정원보다 훌륭했다. 아마 내가 느꼈던 가장 큰 감흥은 크기였던 것 같다. 큰 정원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예상치 못한 넓이가 주는 해방감은 존재했다. 넓은 공원이 주는 해방감이 아니라, 마치 호텔의 넓은 객실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 같은 것이 느껴졌다. 대문을 열었을 때 둔덕으로 가로막혔던 시야가 열리면서 인공도 자연도 아닌 곳이 주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 정도로 큰 규모의 정원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동산 가치가 높은 지역의 대규모 필지들은 대부분 팔려나가고 남아있지 않다. 지금의 성북동 별서도 원래의 필지에서 일부 잘려나간 상태지만 여전히 5천여 평 정도 되는 큰 규모다. 아늑하다는 것이 두 번째 감흥이었다. 넓은 정원의 중심에는 옆으로 넓은 바위가 여러 겹 쌓여 있었다. 상판 위로 물길을 파서 여러 단의 폭포처럼 떨어지게 한 후, 흐르는 물을 가둬 지당을 만들었다. 푸른빛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연못이라는 뜻의 영벽지影碧池 왼편으로는 나지막한 언덕이, 오른편으로는 건축물이, 북쪽으로는 위쪽 정원으로 연결되는 경사가, 아래쪽으로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둔덕이 있어서 아늑하면서도 다른 세계로 온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성북동 별서는 탁월한 입지 선택을 보여주는 정원이었다. 본제라 불리는 건물 계단에 걸터앉아 영벽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정원을 자유롭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허락된 시간은 짧았다. 지당 안에는 수십 개의 각자가 새겨져 있었다. 멋진 경치에 감흥을 적어서 남기는 문화가 있긴 했지만 바위에 빼곡히 암각 된 글씨들은 유명 스타들의 사인을 걸어놓은 맛집을 떠올리게 했다. 고종 대의 내관이었던 황윤명의 별서가 어떤 분위기였을지는 잘은 모르지만 망국의 시기에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성북동 별서 이외에 조선말 세도가문이 등장하면서 많은 부를 축척한 이들이 한양의 곳곳에 정원을 만들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정원은 삼청동 계곡에 있었던 ‘옥호정’이다.



옥호정


만약 옥호정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이라는 상상을 종종 해본다. 그림으로 전해지는 옥호정은 대단한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한다. 옥호정의 주인 풍고 김조순은 정조의 사돈이자, 순조의 장인이며 조선말의 세도정치를 연 장본인이다. 나라의 권력이 하나의 가문에 집중되어 조선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되는데 책임 있는 사람이지만 정원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드디어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개인의 정원이 탄생한 것이었다. 김조순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었다. 문화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의 취향을 가진 부자였다. 지금까지 누구도 가져보지 못했던 규모의 재산으로 만들어진 옥호정은 가장 화려할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정원이었다. 그는 효명세자의 외조부다. 옥호정도는 효명세자가 외할아버지께 제작해 선물한 작품이다. 그림의 절반은 산과 계류와 같은 자연이다. 그만큼 주변의 자연은 옥호정과 하나였다. 서쪽의 큰 바위 꼭대기에는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던 자리가 있다. 일관석이라고 각자 된 산 꼭대기까지가 옥호정의 영역이다. 북쪽에서 동쪽으로 계류가 흐른다. 상하수도가 없던 시절,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계류가 가까이 있는 것은 큰 혜택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빨래도 하고, 논에 댈 물도 긷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원은 사랑마당, 안채 후원, 옥호동천이라 불리는 별원으로 구분된다. 사랑채 정면에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1, 2단에 수조와 파초, 괴석, 영산홍 등 다양한 점경물로 장식하였다. 어떤 위계나 디자인이 있다기보다는 한 두 개씩 수집하고 심다가 자연스럽게 완성된 듯한 모습이다. 마치 할머니 집 테라스에 마구잡이로 놓여 무심히 키우는 화분 같다. 안채 뒤, 계단을 오르면 소나무 군락으로 둘러싸인 산반루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안주인이 손님들과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상상된다. 정자보다 눈에 띄는 것은 둘러싼 담장의 협문들이다.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하나씩 있는 협문은 안주인의 권력을 상징한다. 오른쪽 협문을 통해 자유롭게 외부로의 출입이 가능하다. 지금은 당연하겠지만 당시에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한 독립적인 문을 가진 여성은 많지 않았다. 왼쪽 협문은 하이라이트 공간인 옥호동천으로 이어진다. 협문 아래의 가파른 계단을 통해 남성 손님들이 없을 때, 여성들도 이용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옥호동천에는 지당이 있는데 지금까지 본 여느 디자인과 다르다. 상당히 세련된 형태의 디자인은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자연의 선과 인위적인 직선이 어우러진다. 가운데 직사각형의 판석은 주홍빛이다. 가조라 불리는 나무 홈대에서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혜생천이라는 샘에서 물이 솟아오른다. 흐르고 떨어지고 샘솟고 고여있는 다양한 형태의 물을 넓은 대나무 정자에서 즐긴다. 정자 앞으로 암석에 뿌리내리고 자라는 한 그루의 노송이 있다. 노송 양쪽에는 옥호동천이라는 각자와 정원의 의미를 적어둔 글이 적혀있다. '산빛은 아득한 옛날 같고, 돌의 기운은 오랜 세월 이어지네.'라는 글귀는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의 옥호동천을 묘사한다. 사랑마당과 별원 사이에는 단풍나무대가 있다. 김조순의 호는 풍고, 단풍언덕이다. 단풍언덕 주위로 남쪽엔 기와지붕의 첩운정, 동쪽엔 나이 많은 소나무와 오미자 시렁, 북쪽은 괴석들로 장식되어 전체 정원 영역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동천의 물은 정자를 지나 단풍대를 거쳐 사랑마당으로 흐른다. 사랑마당을 가로지르는 물길은 행랑채를 거쳐 집 밖의 계류와 만난다. 동천과 단풍대, 사랑마당은 물길로 연결된다. 흐르는 물길은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사랑채 끝 방에는 노란색 호리병이 매달려있다. 마치 둥근 초록색 배경과 세이렌을 보면 스타벅스를 떠올리고, 한쪽이 베어 물린 사과를 보면 애플을 떠올리듯이, 은사隱舍라고 적혀있는 호리병은 신선세계를 의미한다. 어릴 적 보았던 만화에는 호리병에서 수천 명의 사람이 나오거나, 소금이 끝없이 흐르고, 금은보화가 쏟아졌었다. 호리병은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신비한 세계, 상상의 세계를 상징했다. 그중에서도 옥호정이 추구한 세계는 모든 것을 갖추고 부족함 없이 화려하면서 세상과 동떨어져 그 어떤 책무 없이 자유로운 세상을 의미했다. 마치 호리병 세상처럼, 옥호정은 실존하지 않고 그림에 머물러 있다.



석파정, 부암동 별서와 함께 직접 방문할 수 있는 정원들에는 백인제가옥과 백석동천이 있다. 서울시에서 관리하고 있는 백인제가옥은 예약하면 안내와 함께 내부도 관람할 수 있다. 부암동 아래 유적으로 남아 있는 백석동천은 색다른 분위기를 주는 곳이다. 울창한 숲 속에서 오래된 유적이 주는 호젓함을 느껴볼 수 있다. 조선의 끝자락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정원들이 많지는 않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유산들이 없어졌다. 만약 우리 스스로 근대화를 이뤄내고 일본처럼 문화의 단절 없이 현대사회로 이어졌다면 서울의 집과 정원이 어떻게 변화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단절의 시기가 변화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수많은 건축 재료들과 발전된 기술 속에서 새로운 한국 정원 문화의 시대가 왔다. 현대 사회의 한국 정원 문화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지 살펴보자.



(참고자료: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2351279) / (원문 역주 후한서 10 / 진기환 역주 / 명문당 / 2019 / 방술열전 하 비방장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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