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화와 비하 사이에서
오랜만에 떠난 나 홀로 여행이었다. 중국어는 할 줄 모르고, 준비해 간 유심칩도 말썽이었다. 상하이 공항에서 쑤저우 숙소까지의 여정은 험난했다. 20년 전, 스마트 폰 없이 배낭여행 하던 세상과 너무 바뀌어 있었다. 간단한 영어 능력과 현금만 있다면 세상 어디든 여행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중국은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서 모자란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계산할 수 있는 배터리가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우여곡절 속에서 6일 간 10개의 정원을 방문했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신 중국 교수님과 만나는 기회도 가졌다. 중국을 여행하며 한국 정원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상하이 일대의 중국 대륙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는 한반도 전체 면적보다 넓었다. 매일 산을 보며 사는 우리에게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의 삶은 6일간의 경험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상하이 공항을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해안의 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섬에도 영락없이 산이 있었다. 인천공항에 착륙해서 보이는 입면의 자연이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입면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인공인 중국과 어딜 보든 나지막한 언덕과 산이 보이는 한국의 정원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6일간의 중국 여행은 항상 주변에 있던 산의 영향력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생각해보게 했다.
산은 우리에게 정서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정원은 정서, 경제,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예술이다. 그렇기에 한국 정원에 대한 고찰은 산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흔히 한국 정원을 ‘자연과 하나 된 정원’이라고 표현한다. 자연에 있는 정원이 많고, 그게 아니더라도 자연 속 정원을 이상향으로 생각하며 만든 정원들이 많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사람이 한 것이 별로 없는 정원,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정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공요소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정원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자연과 하나 된 정원이라며 신화화하고, 어떤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정원이라고 비하한다. 맹목적인 찬양과 실망, 훌륭하고 별로인 정원의 구분보다는 정원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 있다. 무엇을 하는 것만큼이나 하지 않는 것의 의미가 무엇 일지에서부터 시작해 보았다.
중국정원의 화려함은 감당하기 벅찰 정도였다. 자유로운 형태의 지당과 가로지르는 다리, 지당을 둘러싼 화려한 석가산과 회랑들이 중국 정원의 특징이다. 평지에 엄청난 부를 가지고 만드는 정원에서 화려함 말고 추구할만한 다른 가치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도 평지에서 엄청난 부를 가지고 정원을 만들던 때가 있었다. 구체적인 예가 경주의 동궁과 월지다. 동궁과 월지는 중국의 정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청나라와 삼국시대라고 하는 천년의 시간차가 주는 화려함의 정도나 기술의 차이가 있을 뿐, 정원의 골격은 거의 비슷하다. 큰 지당을 중심으로 주변에 건축물이 있고, 자연을 형상화한 장식으로 정원을 꾸미고, 전체를 한 바퀴 소요하며 즐기는 구조가 동일하다. 단지 흙을 사용한 둔덕 위에 나무와 자연석을 배치하여 꾸민 것과, 진기한 형태의 돌산을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하느냐 정도의 차이였다.
우리나라가 산에 공간을 조성하며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군사적 요충지를 선점하기 위해 왕실에서 계획적으로 산에 사찰을 짓기 시작한 통일신라 시대부터다. 지금은 산사가 자연스럽지만 삼국시대만 해도 사찰은 궁과 가까운 평지에 있었다. 미륵사지, 정림사지, 황룡사지가 대표적인 예다. 해골 물을 마시고 고향으로 돌아 간 원효대사와 달리 당나라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대사는 왕명을 받아 군사 요충지가 될만한 산들을 선점했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산 활용법에 특화된 민족이 되었다. 마을과 서원 등 많은 건축물이 산 중턱에 자리 잡았다. 귀한 평지는 농경지로 사용하고 바람을 막아주는 경사지를 골라 머무는 곳으로 활용했다. 부가가치가 높은 평지에서 농업과 상업을 하는 것이 경제 논리에 맞았고, 정원을 만들기에는 산이 좋았다. 소유한 평지에서 농사짓지 않고 정원을 만드는 양반이 어디 있겠는가? 동양 정원의 이상향이 자연이라는 점에서도 산을 정원의 거점으로 선택하는 것이 좋았다. 문제라 할 것은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아 자주 갈 수 있으면서, 정원으로 이용할만한 자연환경이 갖춰져 있는 곳을 찾는 것 정도였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돈이 많아서 부를 자랑하기 위해 정원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조선말 세도가문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무하다시피 했다. 만들어봤자 주변에 낮은 담장 두르고, 작은 연못 만든 뒤, 섬이나 괜찮은 돌에 이름 붙여 즐기는 수준이었다. 경치 좋고, 머물기 적당한 곳에 자리 잡은 뒤, 생활하기 어렵지 않을 정도로 정돈하면 그만이었다. 원래 정원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의 정원은 이와 거리가 너무 멀었다. 나라와 시대를 불문하고 정원으로 부와 권력을 과시해 왔지만, 조선의 경제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가난한 나라의 정원은 채울 수 없는 화려함을 다른 것으로 대신했다. 부족함은 오히려 자유를 주기도 했다. 뽐내야 할 정원이 아니기에 어때 보여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났다. 부족한 자원 안에서 가진 것으로 정원을 만들었다. 욕심을 낸다면 기존의 자연 중에서 활용할 것이 풍부한 곳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정도였다. 부족함을 채운 것은 사적인 언어들이었다. 정해진 것 없는 자유로운 말들이 정원을 채웠다. 운조루의 '배려', 명옥헌의 '사색', 도산서당의 '겸손', 소쇄원의 '기다림' 등은 그런 자유 속에서 가능했던 설계 언어들이다. 이런 주제를 가지고 조성되는 공간은 인위적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자연 그대로일 수도 없었다. 어떤 자연은 그대로 차용하고, 어떤 자연은 티 나지 않게 손을 댔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인공 구조물을 설치하였지만 어디까지나 배경인 자연에 큰 변화를 주지는 않았다. 그대로 둘 것들을 선택하는 것에는 안목이, 손을 댔음에도 티 나지 않게 하는 것엔 기술이 필요했다. 성북동 별서 암반의 물길, 소쇄원의 대나무 홈통과 연결된 바위, 창덕궁 후원 옥류천의 소요암, 경주 독락당의 자계 등에서 발견되는 안목과 기술이다.
결국 어디에 만들지 결정하는 것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기왕이면 특색 있는 자연에 정원을 만들고 싶지 아무것도 없이 나무만 울창한 곳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자연을 찾아 정원을 만들었다. 많은 이들을 매혹시키고, 쉽게 구할 수도, 운반할 수도 없는, 그곳에 자리해야지만 가질 수 있는 자연물이 있었다. 한국 정원의 개성은 거대한 암석인 거석이다. 정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자연으로 들어가 정원을 만들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거석의 존재감은 당연함을 넘어서 지배적이었다. 건물의 기단이 되기도, 가치관을 새겨놓는 표식이기도, 바라보며 즐기는 장식이기도 했던 거석은 어떤 정원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거석은 한국 정원의 고유성이었다. 유네스코는 정원을 한 문화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라 정의한다. 경제력 없고, 정치적 무력함 속에 만든 정원에서 우리가 자연을 대했던 태도를 본다. 보고 즐길 대단한 장식이 없는 초라한 정원이지만 감동을 주는 것은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치열함, 낙담, 그리고 희망이 그 안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거석은 희망의 한 단면이었을지도 모른다. 큰 바위에서 느껴지는 오랜 시간과 변치 않는 가치를 생각하며 가만히 있다가 돌아오는 것에서 정원의 가치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