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놀이로 전국이 들썩이는 10월의 주말 아침, 창덕궁 돈화문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후원 입장표를 사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매년 가을이면 대단한 인기를 끄는 창덕궁 후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관람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덕분에 후원에 들어가면 북적이지 않는 분위기에서 고즈넉하게 조선의 정원들을 즐길 수 있지만, 그런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치열한 티켓팅과의 사투를 벌여야 한다. 매년 어떠한 이유로 창덕궁 후원 티켓을 구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나는 6시면 문닫힌 매표소 앞에 앉아 돈화문 회화나무와 인사하고 담벼락 위로 점차 밝아오는 하늘을 반가워하는 일에 익숙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3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한 번쯤 진득하게 생각해보고 싶었던 주제들을 꺼내서 공상을 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늘의 투어 내용을 점검하는데 쓴다. 많이 해온 일이지만 오시는 분들의 특성에 따라 어떤 분위기로 이끌어 갈지 고민하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한 정보들을 다시 점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달해야 하는 문장들을 다시 되뇌어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창덕궁 후원에 한 번도 가보지 않거나 한번 정도 간다. 특히 방문하기 좋은 계절에 입장권을 구하기가 어려운 주말, 단풍이 곱게 물든 후원에서 정원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것은 인생에 한 번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대 이상의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큰 기대 없이 왔겠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 정원의 매력에 푹 빠지게 만들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숨진 채 투어를 진행한다. 나도 왜 그런 마음이 식지 않고 매년 계속 생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새벽에 일어나 3시간 동안 차가운 바닥에 앉아 티켓을 사면서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다가도 프로그램이 끝나 다시 처음 만났던 곳으로 돌아갈 때면 한 번만 더 하자는 마음이 생겨버린다.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여운, 헤어지는 인사를 나눌 때 주고받는 눈빛들, 누군가는 두 손을 잡고 정말 좋았다 하고, 누군가는 옅은 미소로 수줍게 전해주는 그 마음들 속에서 정원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사는 나의 마음이 채워진다. 고지식한 문화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도 있는 분노, 슬픔, 허탈, 멋으로 채워진 후원에서 인생과 문화를 이야기하다 보면 예술이 주는 감흥과 영감에 젖어 돌아간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들었다는 근사한 기분이 좋은 것은 누군가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시작한 이일의 또 다른 방식이라서가 아닐까라고 짐작해본다.
정원을 만들면서 살고 싶다는 결심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정원을 잘 만들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공부가 길어졌다. 정원은 내면과 깊이 맞닿아 있었다. 들여다본 적 없는 내면 깊은 곳은 내가 속한 문화에 대한 탐험을 시작하게 했다. 그렇게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이해하면서 정원의 언어도 배웠다. 삶의 어떤 단어를 붙잡아 정원을 채우고 비우는지 오래 머물면서 느끼려 애썼다. 전국에 있는 정원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느꼈던 감흥들이 주변을 맴돌았다. 그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어 말과 글로 정리하면서 생각이 깊어졌다. 결국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려는 결심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유네스코에서는 정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정원은 한 문화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이다.’ 전 세계인의 정원이자 우리의 태도를 고스란히 간직한 창덕궁 후원으로 입장하겠습니다.”
창덕궁 정원 투어는 이렇게 시작한다. 꽃과 나무로 예쁘게 장식된 정원을 예상할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고 느껴야 할 것은 태도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창덕궁은 우리 문화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궁이 강한 직선축을 가진 것과 달리 창덕궁의 축은 삐뚤빼뚤이다.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의 예쁜 다리라는 뜻의 금천교 앞에 서서 진선문을 바라보면 길의 축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직선이 아닌 꺾은선으로 궁의 동선을 짠 것도 모자라 90도도 아닌 자유롭게 변하는 선은 근엄해야 할 궁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돈화문에서 금천교까지의 거리 금천교에서 진선문으로 꺾이는 각도와 진선문에서 다시 인정전으로 꺾이는 각도 등에서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느낄 수 있다.
정문으로 들어오자마자 길이 꺾이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 마치 갈대처럼 마음이 바뀌는 사람인 듯 줏대 없어 보인다. 어느 정도 충분한 직선이 정문 앞에 필요하다. 왕이 행차를 하거나 궁으로 돌아올 때, 그를 배후 하는 신하들의 규모가 충분해 보이는 정도여야 한다. 그렇다 보니 금천교는 돈화문에서 최대한 멀면서 인정문을 넘어선 뒤쪽일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최대한 금천교를 멀리 뺀 다음 다리의 각도를 남쪽으로 살짝 틀면 티 나지 않게 진선문을 인정문과 멀리 둘 수 있다. 진선문이 인정문과 가까우면 안 되는 이유는 진선문 이후의 길이 틀어진 것과 상관있다.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면 정면에 있는 것부터 확인하게 된다. 진선문의 정면에는 숙장문이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왼쪽에 있는 인정전으로 자연스레 동선이 안내되어야 한다. 인정문을 크게 짓더라도 길과 평행하게 놓이면 문의 측면만 보일 뿐이다. 금천교를 틀어서 확보한 진선문과 인정문 사이의 공간 덕분에 길을 다시 살짝 북동쪽으로 향하는 사선으로 배치해 인정문이 보이도록 했다. 때문에 정면에 있지만 멀리 있는 숙장문보다 측면에 있지만 웅장함이 느껴지는 인정문으로 입장하게 된다.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의 동선을 두고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지 느껴진다. 궁의 위계를 위해 직선, 혹은 직각으로 동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관념을 버리고서라도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자연이 만든 지형이었다. 궁은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의 민정수석실과 같은 신하들의 근무지 외조는 가장 바깥쪽에 배치된다. 가장 안쪽은 왕의 생활공간 연조다. 신하와 왕이 한걸음 들어가고 나와 중앙에서 함께 정치하는 곳이 치조다. 창덕궁의 삼조는 북악산이 만든 지형에 곱게 앉아 있다. 산과 평지가 만나는 지형을 바꾸지 않고 궁의 주요 전각을 배치했다. 그렇다 보니 삼조의 축이 모두 제각각이고 동선도 복잡해졌다. 산세를 그대로 유지하여 자연 지형을 지키는 것이 일직선의 강한 직선 축으로 권력을 드높이는 것보다 중요한 나라의 궁에서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인정전을 지나 조선시대 유일한 청기와 건물인 선정전을 보고 나면 호텔 로비같이 생긴 희정당이 나온다. 가마가 아닌 자동차를 타게 되면서 바뀐 편전의 모습이다. 숙장문 뒤에 기념품을 파는 빈청은 차고였다. 숙장문을 지난 차가 희정당 앞 로비를 돌아 차고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제 궁의 안쪽으로 들어가 탐험할 시간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궁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좋으니 주저 말고 뒤로 뒤로 향해야 한다.
침전의 뒤편, 깊은 구석까지 들어오는 관람객은 많지 않다. 궁에서 가장 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대조전 뒤에는 내 맘대로 3대 화계라고 정한 대조전 화계가 있다. 아미산 화계, 낙선재 화계, 그리고 대조전 화계는 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화계들이다. 아미산, 낙선재 화계는 윗단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낙선재 화계는 본격적인 조망을 위해 정자를 지어놓기도 했다. 대조전 화계는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윗단에는 울창한 숲과 문들이 있다. 조망을 위에 틔워놓은 두 화계와 달리 빽빽한 숲으로 난 문을 통해 또 다른 세상으로 이어질 듯한 분위기다.
문을 열면 어떤 길이 이어질지 상상해 보았다. 아마 아니겠지만 새벽이나 밤늦은 시간 저 문을 열고 터벅터벅 숲으로 들어가는 왕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분명 후원으로 향하는 지름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대조전 뒤가 부용지라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정조라면 이런 지름길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문이 만들어진 연유까지 멋대로 정했다. 대조전 아래쪽 후원으로 향하는 정식 루트가 아닌 좁고 어둡지만 익숙한 숲길을 지나 한결 편하게 정원에 당도했을 왕의 일탈을 생각해 보는 것이 재밌었다.
어느 날 창덕궁 관계자분을 대동한 투어를 진행한 적이 있다. 비밀의 계단과 문 앞에 서서 저 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지만 만약 후원으로 통한다면 저 문을 통해서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관계자분이 손을 들고 예전에 행사 진행을 위해 저 문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후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고 내 상상이 틀린 게 아닌 것을 확인해 주는 게 기쁘다는 듯이 말해주셨다. 가설에 지지를 받아 기뻤다. 실록이나 문헌에 왕이 저 문을 통해 후원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하나의 의견일 뿐이겠지만 내 마음속에는 계단을 성큼 걸어 올라가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숲으로 사라지는 왕의 모습이 있다. 결연한 마음으로 숲길을 헤쳐 부용지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왕의 모습을 상상하면 문화유산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었던 궁이 되살아 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