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by 월하랑

그동안 읽었던 책들과 정리한 노트를 싣고 여행을 떠났다. 대략 한 달가량 전국을 떠도는 일정이었다. 사찰, 마을, 읍성, 고택, 서원, 별서, 어디든 정원이 있는 곳이라면 가볼 생각이었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 평일 낮에 이어지는 답사 대부분의 시간에 혼자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씨와 하루하루 물드는 단풍을 혼자 즐기는 것을 대상도 없이 미안해했다. 20대 후반, 남들은 세상 어딘가에 자리를 잡기 시작할 무렵, 무엇하나 분명하지 않은 삶이었지만 홀로 여행하며 정원을 만나는 일은 분명 그랬어야 했다는 듯이 마음을 달래줬다. 떠나기 전 불안해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뭔지 모를 확신이 생겼다. 여행의 계기는 단순했다. 다른 나라는 배낭을 메고 둘러봤으면서 정작 우리나라는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부끄러움,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답답함을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 그리고 글로 배운 정원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10월은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조금씩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을 느끼며, 추워지는 날씨 속 아름답게 물든 후 떨어지는 낙엽을 보는 것이 아쉽고 좋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을 수도 없이 반복했을 이곳에 나의 방문은 한번 일지도 모르기에 그 한 번을 여러 번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일단 정원에 도착하면 충분히 오래 머물렀다. 충분하다의 기준은 정원과 만났다는 기분이 들 때까지였다.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답이 들리기도, 질문만 남기도 했다. 낭만적인 여행같이 들리겠지만 치열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9시 전에 첫 번째 답사지에 도착하고 해가 지기 전에 다음 숙소로 이동했다. 서두르지 않고 정원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여 감상하다 보니 보통 하루에 2군데 많으면 3군데를 방문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은 체력적으로도 불가능했다. 방문 전 사전조사를 충분히 했다. 못 다 읽은 논문을 마저 읽고, 평면도를 그려보며 동선을 짐작했다. 돌아와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당일 방문했던 곳의 사진은 그날 정리하고 다음 답사를 준비했다. 한 번의 방문을 여러 번으로 만드는 방법은 실제로 여러 번 도는 것 말고는 없었다. 마치 여러 번 방문하는 것처럼 한 바퀴를 돌고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도는 방식이었다. 정원마다 총 4바퀴를 돌았고 각 라운드마다 테마를 달리했다. 처음엔 자유롭게 돌았다. 어떤 선입견 없이, 뭘 봐야 한다는 목적 없이 자연스럽게 마음에 드는 감흥을 느꼈다. 사람도 그렇듯 공간의 첫인상이 중요했다.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은 나만의 감흥을 느껴보려고 했다. 다시 밖으로 나온 후 잠시 쉬었다가 두 번째 방문을 시작했다. 이번엔 정리한 노트를 꺼내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짚어가며 관찰했다. 자연스러운 동선을 따르지 않고 일부러 거슬린 선택을 해보기도 했다. 생소한 명칭도 되뇌어보고, 글로만 보았을 때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을 유심히 보았다. 또다시 밖으로 나온 후 세 번째 라운드를 시작했다. 처음 돌면서 눈에 들어왔던 경관들, 중요한 조형물들, 나중에 누군가에게 보여줄 때 충분한 설명이 될 만한 정보들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마지막 바퀴를 돌 때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자연스레 드는 마음의 소리가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고요한 시간에 머물면서 정원의 구조와 배치 이유를 살펴보다 보면 만든 이의 성격이 짐작되기도 했다. 성격이 급한 사람, 너그러운 사람, 소심한 사람, 호탕한 사람인지 생각해 놨다가 돌아와서 주인의 인물평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면 찾아 읽어보려 애썼다. 매일 적게는 50km, 많게는 7~100km를 운전했다. 혼자 시골을 돌아다니며 먹을 수 있는 것은 산채비빔밥뿐이었다. 이외 다른 음식들은 모두 2인 이상 주문 가능이었다. 한 달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5kg이 빠져있었다.


잊을 수 없는 감흥과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뒤섞여 돌아왔다. 기대 없이 떠난 여행에서 정원들을 만나며 뭔지 모를 무언가가 마음속에 생겼다. 정원을 만든 이들은 대부분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거나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정원은 시간이 지나 잊혀 관심도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있었다. 방치돼서 어지러워진 것들을 걷어내면 삶에서 의미를 잃지 않고 하루하루 마음을 달래며 살아내기 위해 만든 정원의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성취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끝없이 들려주는 정원에서 삶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원의 주인 중 그 누구도 인생의 정점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는 없었다. 삶은 의미 없음 속에서 의미를 찾고, 괴로움에 타협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라는 것을 창밖으로 보이는 버드나무 타고 올라가는 다래덩굴과 물이 차고 빠질 때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암석을 보며 마음을 다잡던 이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매화나무 가지에 매달린 달을 보며,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들으면서 이런 삶이라면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의 집과 정원에서 봄바람맞으며 소중한 이들과 함께 손잡고 노래 부르는 것이 인생이라는 가르침을 얻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으로 완성한 공간에서 거칠지만 초라하지 않고 빛나는 의미들이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아무도 없이 정원을 오롯이 느끼고자 노력하는 내게 전해졌다. 정원을 만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엿보며 나와 세상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마음에 흔들리지 않을 무언가가 생겼다. 그 마음과 생각들을 추상적인 찰나의 기분으로 날려 보내지 않고 구체적인 글로 남기고 싶었다. 마음을 나눴던 정원과의 추억이 실제 존재하는 무엇이 되어 옆에 있었으면 했다.


20대 후반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했던 내게 길잡이 같은 스승이 되어준 정원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40대가 돼서야 책을 완성하게 된 것은 정원의 깊이를 소화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핑계 대본다.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새로 깨닫는 것이 많았다. 원하는 만큼 생각에 빠지고 머물렀던 정원에서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10여 년 동안 그날의 감흥을 수 없이 떠올려 구체적인 언어로 정리해 온 시간에 감사하다. 내 손을 잡고 기꺼이 언덕에 올라 봄바람맞으며 함께 노래 불러주는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친구와 동료가 있기에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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