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지 않는 조연의 역할

봉화 청암정

by 월하랑

마을 어귀를 흐르는 실개천은 저무는 햇빛을 받으며 빛이 났다. 주변은 벌써 어두침침해져서 색을 잃어가는데, 유독 윤기가 흐르는 듯한 물 길에 눈이 갔다. 이 물로 키운 곡식들은 풍성하고, 실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닭이 알을 품은 듯한 마을이라는 닭실마을의 이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마을에는 커다란 거북 바위가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거북 바위는 물가로 가지 못해 말라가고 있었다. 주변으로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고 등껍질을 대신할 정자를 만든 것이 청암정이었다. 조선 전기의 문인, 충재 권벌이 봉화에 만든 정원 이야기는 동화 같았다.


정원은 권벌의 종택 바로 옆에 지어졌다. 정원을 둘러싼 담장에는 문이 하나씩 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용하려고 만든 문을 제하고 종택에서 정원으로 바로 이어지는 정문을 열면 시선의 정면에 다리와 정자가 있다. 정문에서부터 다리 그리고 정자의 계단까지 모든 동선을 일직선 축에 두기 위해 문의 위치를 담장 한쪽 끝으로 쏠리게 했다. 축은 충재 권벌 가문의 위상을 나타낸다. 땅에서부터 다리로, 다리에서 계단으로, 마침내 가장 높은 정자에 도착하는 동선의 상승 역시 일직선의 축과 함께 위상을 드높이는 효과를 키운다. 마치 거대한 거북이 위에 올라탄 듯한 권벌 가문과 그들의 허락을 받아 함께 정자에 오른 이들을 상상하면 단순한 정원이지만 그 역할은 작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의 주인공은 정자이지만 주인공이 빛날 수 있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조연에 더 눈길이 가는 나는 위풍당당한 정자로 건너다 말고 다시 내려왔다. 넓지 않은 다리폭이라 혹시라도 빠질까 아래로 향했던 시선에 다리의 아름다움이 들어왔다. 돌을 다음은 매무새가 너무 예뻐 제대로 보고 싶었다. 돌의 깎여진 선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다웠다. 박물관에 있는 도자기, 탑만 아름다울까, 이런 다리의 선에서도 같은 미감이 느껴지는 걸. 돌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 문득 다리 전체의 모습이 궁금해 멀리 떨어져서 보았다. 역시 좋았다. 조연이기에 눈에 띄지 않도록 한 것조차 다리의 아름다움에 더 취하게 했다.


다리의 폭이 조금이라도 두꺼웠다면, 중간 기둥의 폭이 조금이라도 짧았다면 이런 아름다움은 완성되지 않았다. 돌의 마감들을 자세히 보면 측면을 살짝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 보인다. 중간 기둥의 다리는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고 기둥의 다리가 받히는 가로방향 돌은 아래쪽으로 살짝 깎여있다. 줄어들었다가 다시 넓어지는 돌의 리듬감은 호안의 계단에서도 이어진다. 넓은 통돌을 제일 밑에 깔고 그 보다 작은 중간크기의 가로방향 돌로 한단 높인 후, 다리와 같은 축의 세로 방향 돌이 호안에 조금 걸쳐져 가벼운 계단을 만들었다. 가장 아래 넓은 통돌 위에 그보다 작은 돌로 세로 방향 돌을 받혀 생긴 빈 공간이 다리를 한결 가볍게 만든다. 만약 이 공간이 채워졌다면 한쪽으로 균형이 쏠려 무거워 보였을 것이다. 이리저리 교차하며 변주되는 돌 앞으로 묵직한 지지돌이 있다. 역시 눈에 띄지 않게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돌은 다리의 폭보다 작지만 세로변을 살짝 길게 하여 묵직한 느낌을 주었다. 만약 다리 폭보다 넓었다면 시선이 그쪽으로 빼앗겼을 것이고, 세로폭이 조금 더 짧았다면 계단을 안정적으로 지지해 주는 묵직한 느낌이 덜했을 것이다. 한국 정원을 통틀어 이보다 더 아름다운 다리가 있을까? 궁의 화려한 홍예교보다 좋았다.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다. 내게 가장 아름다운 다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보물로 지정되게 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다리의 불안정성을 빌미로 수리에 들어가 제 모습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보물로 지정되면 탑이 수리될 때처럼 신중하고 소중히 다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정자에서는 종갓집 며느님이 인터뷰 촬영을 하고 계셨다. 멀리서 이지만 강단 있게 말씀하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느지막이 도착해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청암정에 앉아보는 호사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빠져나왔다. 어두워지는 마을에서 벗어나 서둘러 고속도로로 진입하는데 꼭 시간 여행을 한 기분이 들었다. 옛 모습을 간직한 마을과 함께 있는 정원이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분위기였다. 정원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정원만 덩그러니 남아 별 감흥 없이 돌아왔던 기억들도 떠올랐다. 닭실마을을 뺀 청암정을 상상해 보니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정원의 감흥은 시간이 지나 없어질지도 모르는 옛 마을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오지랖이었다. 당장 먹을 저녁과 내일 답사 준비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었다. 피곤한 몸을 뉘인 채 잠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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