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분야가 아닌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정영선’이라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듯한 80대 노인의 이름은 정원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에 박혀있다. 한국 조경의 1세대이자, 작품의 나열이 한국의 현대사가 되기에 경외감도 들지만 많은 이들의 가슴에 그의 이름이 들어차는 것은 작업에서부터 느껴지는 진정성에 있을 것이다. 작은 사이트, 대단위 프로젝트건 상관없이 그가 작업한 곳에는 그만의 정서가 담겨 있다. 문학소녀로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시를 짓던 감수성이 그대로 정원에 녹아든 듯하다. 한국에 ‘조경’이라는 단어가 들어오기 전, 기자 생활을 하다 1973년에 신설된다는 ‘조경학과’의 공고문을 보고 서른둘의 나이로 입학하며 조경가의 삶을 살아왔다. 이후 대한민국의 발전과 함께 그의 작업은 주요 장소 곳곳에 수놓아졌다.
예술의 전당, 선유도 공원 등 많은 작품이 있었지만 무지했던 학부생 시절, 직접 안내받은 사유지 정원이 처음 접한 그의 작품이었다.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가파른 경사로 쉽지 않은 지형을 오히려 시선의 연출로 풀어냈던 이야기, 채움과 비움의 이유, 평소에 접해본 적 없는 한국의 들판에서나 봤음직한 식재 등은 그동안 사례로 봐왔던 해외작품들에서 채워지지 않던 갈증이 사라지게 했다. 세계적인 디자인에는 고유성이 있었다. 작품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디자이너의 정체성은 개성과 매력을 완성했다. 외국의 좋은 사례를 볼수록 한국성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지던 차에 온 그의 말과 생각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나라 산과 정자에 가서 현판에 달린 시를 읽고 옛사람들의 경관 보는 방식을 느껴보려 한다는 말, 결국은 가서 많이 보는 수밖에 없다는 말은 마음 한 구석에 숙제로 남았다.
틈이 나면 가까이에 있는 그의 작품으로 향했다.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서울올림픽미술관의 조각공원, 희원 등을 보며 그의 말들을 떠올렸다. 배경이면서 전체 분위기를 주도하는 조경의 역할을 다하는 그의 작품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미학이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한국성은 과거의 공간을 재현하거나 옛 재료를 사용해서가 아니었다. 정원을 만드는 방식에 있었다. 한국 정원을 만든 유학자들은 모두 시인이었다. 그들에게 정원은 하나의 시였다. 세상을 하나의 시로 담아왔던 이들에게 정원은 시이자 은유였다. 시인이자 조경가인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땅에 쓰는 시가 되어 정원이 되었다.
비가 오는 봄날 서울아산병원을 방문했다. 아파서가 아니라 병원 앞에 조성된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남편의 오랜 병원 생활을 통해 환자와 간병인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아산병원 지하 주차장 위 공원 조성에 성심을 다했다. 환자 침대 건너편 보이는 장례식장과 화장터가 마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에게 손짓하는 듯 보이는 것이 잔인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고단한 병원 생활에서 울고 싶고, 쉬고 싶어도 자리가 없는 안타까움이 무보수 설계를 결심하게 된 이유였다. ‘맘 편히 울 수 있는 곳’이란 설계언어로 완성된 공원엔 비가 와 아무도 없었다. 울창한 숲과 벤치가 나열된 단순한 설계로 볼 수도 있지만 산책자를 위한 동선과 벤치의 간격에서 세심함이 느껴졌다. 걷는 이와 앉은 이의 동선은 서로 방해되거나 눈치 주지 않으면서 같은 정원을 공유하였다. 벤치 배치는 일관적이면서도 약간의 변주를 주어 기분에 따라 어디에 앉을지 고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까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이야기를 하다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았고, 마주 보는 벤치가 없는 곳에서는 조용히 지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에 띄지 않지만 저마다 조금씩 다른 벤치의 간격은 누군가는 이어주고, 누군가는 맘 편히 홀로 있을 수 있게 하는 그런 곳이었다. 든든한 그늘을 만드는 주변의 나무는 울창하지만 웅장하지 않고, 둘레가 크지 않지만 가지를 채운 빽빽한 이파리가 울창한 숲을 만들었다. 약해 보이는 나무 기둥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가지를 하늘로 보내 잎을 피우는 모습이 위로가 됐다. 가느다란 나무가 너도 할 수 있다고 말없이 응원해 주는 듯 보였다. 나무 아래로 왕성한 지피 식물과 함께 완성된 숲은 꽃이 피는 것을 보며 내년 봄에는 살아서 나가야지 하는 의지를 다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괜찮다는 말보다 힘든 마음을 꺼내 보일 수 있어서, 내색하고 싶지 않은 속상함과 걱정을 견뎌내느라 지치고 두려운 마음을 내비쳐도 괜찮은 곳이 있기에 아픈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는 이들의 마음은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졸업 후 몇 년이 지나 결국 차에 짐을 싣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혼자 가지고 있던 채무감을 덜어냈다. 그가 말한 한국의 아름다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를 눈과 가슴에 담았다. 그러한 미학을 자신의 삶을 통틀어 되살리는 그의 작업을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진다. 허리 굽히고 앉아 땅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은 항상 까맣다. 꽃과 나무에게 말을 걸며 중얼거리는 그는 현장의 치열한 싸움에서는 단단한 몸을 굽히지 않았다. 조경가로 살아온 50여 년의 세월이 남긴 세상의 무수한 작업들에서 가슴속 깊이 잊지 않아야 할 무엇인가를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