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식물

by 월하랑

조경학과에서는 생각보다 식물에 대해 배울 기회가 적었다. 조경가라면 자고로 식물 전문가여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학점 받기 어렵다는 산림과, 원예과 수업을 들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는지 어쭙잖은 실력으로 같은 과 친구들이 물어오는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곤 했다. 식물원에 취직하는 것을 심각히 고려해 볼 정도로 진심이었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어렵게 키운 실력이지만 계속 이어나가지 못했다.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 국가유산 전문 자격증 공부에 매달리며 수년의 시간을 쏟고 난 후에는 느티나무도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이 돼버렸다. 조경이든 정원이든 식물은 공간 구성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갔던 것은 떨어진 실력 때문은 아니었다.


생각의 변화에는 역사정원을 공부한 것의 영향이 컸다. 답사했던 대부분의 공간에서 눈에 띈 것은 식물보다는 돌이었다. 몇백 년이 지나도 정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가치를 지킬 수 있게 하는 것들은 돌이었다. 영주 부석사의 석축, 경주 동궁과 월지의 암석들, 정자의 기단 역할을 하는 자연의 거석들, 서석군이라 불리는 돌들까지 육중한 모습으로 공간의 중심을 잡아주는 돌에 매료됐다. 반면 역사 정원에서의 식물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남성의 공간에는 군자를 상징하는 소나무, 매화, 국화, 대나무를 심는다거나 여성의 공간에는 유실수 위주의 식재를 하는 식이었다. 심는 위치에 따라 변할 경관의 중요도보다 상징적이거나 실용적 의미에 더 무게가 실리는 편이었다.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한국 정원이라는 말이 무색한 인위적인 식재였다.


돌에서 공간구성, 그리고 사람으로 관심이 옮겨 가다 보니 어느새 식물과는 멀어졌다. 자연에 대한 이해와 생태적 지식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공간을 만드는 것이 정원이라는 생각이 사라질 지경이었다. 식물보다는 정원을 만드는 이유가 중요했다. 의도를 바탕으로 동선과 건축물 간의 관계를 결정하고 주인의 안목에 따라 완성도의 깊이가 달라지는 정원을 이해하는 것이 좋았다. 식물과의 심리적 거리가 멀어진 사이 한국에는 자연주의 식재라는 이름의 정원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에는 외국 서적이나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정원들이 이젠 한국 정원의 주류가 되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회양목 같이 원하는 모양으로 다듬기 쉬운 나무들로 자수를 놓듯이 문양을 만들던 정형적인 정원에 반기를 들고 시작된 새로운 정원 양식이 지금의 그라스 가든 혹은 자연주의 식재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정원 열풍이라고 불릴 만큼 매년 여러 지자체에서 개최하는 정원박람회에서도 자연주의 식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정원은 보기 힘들 정도다. 색의 조화 따윈 아랑곳없이 노랑이 있으면 빨강과 파랑도 기본이지 하는 온갖 색상의 꽃들로 넘치는 공원이 아직도 있긴 하지만 대세는 넘어왔다. 적절한 생육환경에 알맞은 식물을 아름답게 키워내는 모습이 하나의 수행과정 같았다. 정원을 만든다는 것이 식물을 돌본다는 것과 같은 말로 통용되는 요즘 정원의 치유 능력은 감상보다도 만들고 가꾸는 과정에 있었다. 땅에 주저앉아 흙을 파내고 식물을 심는 행위에서 겸손함과 뿌듯함이 뒤섞여 자연의 일부라는 안정감까지 누리고 정원과 하나가 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담장 넘어가 온통 자연이었던 한국 정원의 울타리 안은 자연스러울 필요가 없었다. 자연에 들어가 정원을 만들었기 때문에 울타리 안에 어떤 자연은 그대로 두고 없앨지 결정한 후, 주인이 원하는 식물이 있으면 심었다. 식물을 결정할 때는 저마다 가진 고유한 덕목을 고려했다. 편안함, 장수, 그윽함, 맑음, 귀함 등 여러 덕목들을 생각하며 바라볼 때마다 그런 성정을 닮고자 했다. 자연스럽다는 한국 정원은 오히려 식물 활용 방식에 인위적이었고, 인위적이라는 서양의 정원은 식물로 자연을 연출했다. 한국 정원의 자연스러움과 자연주의 식재에서의 자연은 다르다. 자연주의는 인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자연을 연출하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인위적으로 전정하던 회양목을 자연스러운 초화류로 대체한 것이다. 서양에서의 정원은 자연 재료를 인간이 추구한 아름다움을 구현해 내는 도구로 여겼다. 한국 정원의 자연스러움은 인간이 만든 울타리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었다. 자연에 들어가서 정원을 만들다 보니 경관을 이루는 외부가 모두 자연이었고 그것과 아주 어울리지 않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뿐이지 그렇다고 자연스럽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건물 앞에 덩그러니 놓인 파초와 매화나무는 의미만 나타내면 다인 듯 무심해도 너무 대충 심겼다. 소쇄원 초정 뒤의 벽오동은 좋은 예다. 좁은 길 담장에 바짝 붙은 나무는 봉황이 내려앉는 것을 본다는 목적으로 덩그러니 심겨 있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정원에서의 식재가 대단히 계획적으로 심겼다기보다는 의미에 중점을 두고 툭툭 무심한 듯이 놓였다. 한국 정원이 추구한 자연스러움은 대단한 결심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된 미감이었다. 무심한 것인지 작정한 것인지 좀처럼 의도를 알 수 없는 미학은 정원뿐 아니라 도기와 그림 등 다른 예술에서도 보이는 한국의 특징이다.


이 정도 되면 식물이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느껴질 수 있지만 나 역시 유럽의 정원들을 보면 환장한다. 도구로 사용하건 어쩌건 아름답게 흩날리는 초화류를 보면 입을 틀어막고 새어 나오는 감탄에 넋을 잃는다. 이 정도로 완성도 높은 정원을 정성 들여 매일 관리하는 사람들의 자세 역시 아름다움의 일부다. 우리나라처럼 혹독한 겨울이 없어 사용할 수 있는 식재의 범위도 넓고, 높은 GDP와 미적 감각의 상관관계는 모르겠지만 안내판 하나, 경계석 하나 허투루 만들지 않은 유럽의 정원은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다. 과거의 정원이 그랬다고 지금의 내가 나무에다 같은 의미를 붙이고 성정을 기를 리 만무하며 그린벨트로 묶인 자연에 들어가 정원을 만들 수도 없다. 다만 '한국미의 조명'에서 조요한이 말했듯이 과거에 대한 비판적 지성과 역사적 직관을 가질 필요는 있다. 문화에 대한 내면화 작업과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나의 필연과 선택에 집중할 때 새로운 흐름은 만들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야 한다고 한다.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면 엉뚱한 결과물만 나올 뿐이다. 그 시대의 욕구는 자연스럽게 문화가 된다. 자연주의 식재, 플랜테리어 등 정원에 대한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나의 필연과 주체적 선택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정원에 진심인 모두가 공유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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