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인생을 알 수 없다
‘의리, 우정*, 친구’ 등 어릴 적부터 친한 동네 친구들만 보아도 남녀를 불문하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스타일이었다. 남녀 가리는 건 생각도 하지 않고, 마냥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아이였다. 유치원, 초, 중, 고, 대학교 때까지 쭉 훑어만 봐도 주변에는 늘 남사친 여사친의 비율이 동등하였고 함께 어울려서 이야기 나누거나 좋은 소식 전하며 지내는 나날들이 이유 없이 즐거웠다.
*우정 友情; 친구 사이의 정.
유치원 때는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바로 친구 해버리고, 초등학교 때는 동네 친구들과 매일 저녁 시간 전까지 놀이터에서 뛰어놀다가 엄마가 부르면 저녁 먹을 시간이 왔음에 아쉬워했으며, 다양한 반을 옮겨 다니면서 많은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이어서 중학교 때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조금은 내성적인 분위기로 흘러가도 남녀공학이었다 보니 남사친들 만나면 수줍은 듯 인사라도 전하고, 고등학교 때는 여고를 다녔다 보니 그제야 여자의 정체성에 대해 심오하게 생각하지만, 친한 친구들과 정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즐겁게 지냈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대학교 때는 고향을 떠난 다른 지역에서 지냈다 보니, 친구에 대한 그리움에 학교 속에서 친구를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영화감상 동아리’로 들어가면서 선후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깊은 공감대 형성으로 두루두루 친하고 재미있게 활동을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며 친구는 친구고 인연은 인연이란 생각이 슬금슬금 내 머릿속으로 이성과 함께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내 사람들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했었다. 과거를 살펴봐도 남사친이 많은 스타일이다 보니 좀 ‘터프하고 의리 있는 여자’로 느껴지는 건 당연했었고 어디를 가나 자기 색깔이 분명한 느낌은 나 스스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이 늘 걱정하던 건, ‘좀 더 여우 같고 여성스러운 모습이 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란 전제하에 그래도 조금씩 여성스러워지기 위해 관리하고 스타일도 이리저리 꾸미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느끼는 건, 나라는 존재가 가진 색깔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색채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내가 그 색깔을 어떻게 보고 느끼냐에 따라, 그리고 그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친구들의 마음이나 행동 그리고 주변인들이 변하고 달라지는 이유도 그런 부분에서 연결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태어난 본질 그대로 살 수 있다면 아마도 신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해져 있을 것이란 착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본모습으로 사람들과 만나다 보면 나도 모르던 나를 알게 되고, 함께한 사람들의 느낌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기 마련이다.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인생을 알 수 없다
옛날 어르신들께서 하시던 말씀 중,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인생을 알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죽기 전까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만나서 어떠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 속에서 무엇을 깨우쳤는가에 따라 ‘나’라는 사람은 달라진다.
‘친구’라는 의미에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내 옆에는 늘 소중한 이들이 함께하였고 지금도 그 소중한 이들과 함께 즐겁고 유쾌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만약 어릴 적부터 친구를 믿지 못하고 의지하기를 껄끄러워했다면, 지금의 나를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친구의 인생은 친구가 선택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나의 인생은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누구의 것이 더 소중하다고 말할 순 없다.
그 두 사람의 인생이 만나면서 서로 모르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간접적이라도 배우고 깨닫게 된다. 그 시간이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 되면서 각자의 인생 일기 속에 고이 간직해 놓을 수 있다.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기에 다시는 되돌릴 순 없으니, 나는 늘 그 순간순간의 추억을 일기장에 담아 놓으려 애썼던 것 같다. 그리곤 가끔 그 친구가 그립거나 그 추억을 다시 꺼내 보고 싶을 땐, 일기장으로 들어가 그때의 나와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친구’에 대해 소홀할 수 없는, 그들은 귀중한 내 인생 속 사람들이다. 여러 명의 친구가 있다면 각 친구만의 스타일과 삶의 방식, 철학 등이 모두 다르다. 그 다양한 생각들을 들어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내가 그 친구들의 인생 영화를 보는 한 명의 방청객으로 앉아서 웃고 울며 살펴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고, 그들과의 오해나 작은 서운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그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어서다.
남사친 여사친을 가리지 않았던 환경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양가 가족 모두 사촌들이 너무도 많다 보니 어릴 적부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밥 먹던 추억이 셀 수 없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그것을 기점으로 학교에 가든 단체활동을 하든 상관없이 어디서든 위축되거나 숨으려는 습성은 거의 없었고, 가족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받은 사랑을 내 소중한 이들에게 나눠 주고 싶은 마음도 생겨난 것은 아닐까 싶다.
‘인생은 공평하다’라고 했던가. 그 말이 타당하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가진 자가 많거나 가지지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여도, 언젠가 서로에게 주고 나누게 되어있다는 것. 정해지거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시점에서 인생을 살펴봤을 땐,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전달하고 나눠주는 것이 최고의 선물이자 마음이다. 사람은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가져갔다가는 욕심의 무게에 다시 쓰러지고 마는 운명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거나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그 순간은 많이 소유한 것에 안락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그 잡고 있던 손이나 마음은 그 무게에 못 이겨 지쳐 쓰러지거나 아파 버리고 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군가 강요한 것도 아니다. 그냥 선한 마음으로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에게 자신도 모르게 조금이라도 성의를 베풀고 나면 그것이 인생의 풍요로움을 알게 되는 지름길이니 말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선한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그렇게 베풀 수 있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고, 사람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배워나갈 수 있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사람을 사귀더라도 자신과 함께 웃고 울어줄 수 있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이다.
친구를 만나는 순간은 또 다른 나의 분신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속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해 주며, 내가 해결하지도 못할 일에 대해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만큼 자신이 그들에게 보여준 속마음이나 진심 어린 생각들이 잘 전달되고 보여줄수록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많아진다.
‘인생의 깊이’라고 했던가? 성숙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아무리 혼자서 발버둥 쳐봤자 찾아오는 것은 단순한 경험뿐이겠지만,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도전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간다면 좀 더 여유로워진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이라는 이름 안에 더 소중한 사람의 인생도 함께 포함되어서 같이 걸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땐, 인생의 깊이나 넓이가 좀 더 커졌음을 깨우치며, 그들에게 더 감사하게 된다. 나 혼자서 일궈낸 내 인생이 아니라 내 소중한 사람들이 나를 위해 그렇게나 많이 신경 써주고 수고해 줬음을 드디어 알게 되어, 그 감격에 따스한 눈물 한 방울이 뺨 위로 흘러내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