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의 엄마를 다시 안아주는 일

내면아이로 남은 엄마의 멈춘 시간

by 기록하는여자

엄마와 점심을 먹고, 소파에 자리를 잡아 나란히 앉았다.
따뜻한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는데, 여느 때처럼 이야기 흐름은 어느새 오래된 시간으로 흘러갔다.
엄마의 지난날은 늘 그렇게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겹겹이 쌓인 상처의 껍질이 천천히 벗겨지듯,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밖으로 나왔다.

"힘들었으면 그냥 나왔어야지. 차라리 도망을 가지.. 누가 그런 걸 참고 살아?"
나는 한참을 고개 끄덕이며 듣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대답을 삼키려다 퉁명스러운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더 듣게 되면 엄마의 마음이 어디까지 무너질지..
그게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러면 엄마는 늘 같은 말로 끝맺곤 했다.
"애들이 어렸잖아. 너랑 오빠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

너희들 때문에.
그 말은 묘하게도 느린 속도로 날아와 내 가슴에 콕 박혔다.
어렸던 엄마의 그 시간을 나는 늘 감사해야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몰라주면 안 되는 무언가가 된 것만 같았다.

요즘 말로는 그걸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는데,
나는 그 단어가 참 무거웠다.
나는 태어나고 싶다고 한 적이 없었다.
그저 태어났더니, 엄마가 있었고 아빠가 있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엄마의 인생은 스물셋에서 멈춘 듯했다.
그때의 추위가 아직도 엄마 가슴 안에서 사그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40년도 넘은 이야기를 꺼내고 또 꺼내며
아직 낫지 않은 상처를 다시 만지작거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마음 한편이 시큰거렸다.
어쩌면 오래 묻어둔 것일수록 더 자주 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 게 아니라,
누군가 함께 바라봐 줄 때에야 비로소 옅어지는 걸까.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또 엄마를 막아서고 말았다.
"홀어머니에 줄줄이 동생들 딸린 장남한테 시집가는 게 그렇게 힘들 거라 생각 안 했어? 왜 결혼을 했어? 외갓집에서 그렇게 반대했다며.."
그 말이 엄마 마음을 더 깊게 찌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치 나의 상처만큼 엄마도 상처받기를 바라는 듯,
내 말잔등은 더 날카로워졌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엄마보다 먼저 미안해졌다.

할머니도, 아빠도 이제 곁에 없는 지금.
결론도 화해도 없는 이 오래된 이야기는
왜 아직도 끝나지 않을까.
엄마의 시집살이는 끝났지만,
엄마의 시간은 그곳에 그대로 갇혀 있는 듯했다.
엄마의 네버엔딩스토리.
엄마는 여전히 그 시절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우리 앞에서 작게 떨고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어느 순간,
나는 문득 낯선 얼굴을 보았다.
엄마의 말투 사이로 아주 오래된 내면아이가 울고 있었다.
스물셋의 엄마.
아무도 안아주지 못했던 그 어린 엄마가
내 앞에서 작게 떨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언제쯤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을까.
아니, 언제쯤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마 엄마를 이해한다는 건, 그 시대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는 게 아니라
그때 버려진 마음을 함께 들어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커피 잔 위로 흘러나오던 엄마의 한숨이
이상하게 오래 가슴에 남았다.
엄마의 어두웠던 시간을 조금 천천히, 그러나 함께 덜어내고 싶었다.
내가 먼저 부드러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엄마의 스물셋을 꼭 안아주고 싶다.
그때 받지 못한 위로를
조용히, 오래 건네주고 싶다.
엄마가 오래 품고 있던 그 겨울이
조금은 따뜻해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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