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터지던 그날의 통화
며칠 전,
지인 E 씨와 통화를 하다 한참을 웃었다.
기억을 꺼낼 때마다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가는 그날.
내가 크게 웃은 이유는,
한 사람의 애정 어린 농담 때문이었다.
E 씨는 결혼과 동시에 주부의 길에 들어서며
처음 인연을 맺은 사람이 나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작이 나여서 정말 다행이고,
지금도 고맙다고, 종종 고백하듯 이야기한다.
"제가 주부로서 처음 만난 사람이 언니여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존재로 남아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살아온 날들이 조금은 단단해지는 느낌이 든다.
기억은 언제나 감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 말이 고맙고, 그래서 그 기억이 좋다.
며칠 전, 그녀는 또 다른 고백을 내게 건넸다.
"제가 동네 언니들한테 언니를
정말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늘 자랑해요.
그러니까 언니, 절대 정체가 노출되면 안 돼요.
환상이 깨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본인은 나에 대해 여기저기 자랑을 하고 다닌다니.
내가 무슨 정체를 숨겨야 하는 연예인이라도 된 듯
한참을 웃었다.
그 웃음에는 감사도, 우정도, 장난도 모두 섞여 있었다.
나는 질세라 맞받아쳤다.
"나도 최근에 블로그에 E 씨 이야기를 썼어요.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으로 바꾸는 사람'이라고요.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녀도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실체가 들키면
나까지 함께 들통날 수 있으니 조심해 달라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말장난을 주고받았고,
함께 깔깔대며 웃었다.
서로의 정체를 지켜주는 일처럼,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빛내주는 일이
왠지 우리 사이의 묘한 약속 같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그건 피보다도 진하고,
말보다도 깊은 어떤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나는,
주부라는 이름으로 만난 인연이었고,
서로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가까운 친구였으며,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우리 둘 다
'아는 사람만 아는 전설' 정도로 남자고,
환상은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그렇게 웃던 그날의 통화.
지금 생각해도
그 웃음은 내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퍼져 있다.
세상은 때때로 무겁고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한 사람과 웃을 수 있는 기억이 있다는 것.
그 기억 하나로도
삶은 조금 더 괜찮은 쪽으로 기울어진다.
어쩌면,
우리 인생엔
그저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빛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가장 커다란 위로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웃음소리가,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지친 하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줄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을 곁에 두었고,
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니,
우리의 환상은
조금 더 오래
지켜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