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한 달에 한 번, 엄마와의 데이트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 나도 어른이 되었다.

by 기록하는여자

말하지 못했던 말들이 있다.
사춘기 소녀처럼 툭툭 눌러 담았던, 엄마에게조차 꺼내지 못했던 마음들이 있다.
혼자 사시는 친정엄마와의 데이트는 늘 짧고도 길다.
함께 걷는 시간 속에서 문득, 어릴 적 나의 서운함이 스치고, 그럴수록 이제는 미움보다 사랑이 더 크게 밀려온다.
'그땐 왜 그랬을까.'
'그 말, 그때 해줬으면 좋았을 걸.'
삶의 중턱에 서서 나도 엄마가 되어보니 이제야 엄마의 마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사춘기를 지나 중년이 된 내가 이제는 엄마의 어린 시절을, 젊은 아내였던 시절을, 그리고 홀로인 지금의 시간을 바라보며
그때 하지 못한 이야기를 오늘의 일기처럼 써 내려간다.

<엄마를 쓰는 저녁>은 엄마로 살아가며 '딸'로서의 마음을 되짚는 기록이자,
삶이라는 긴 하루 끝, 사랑을 배워가는 여자의 고백이다.




작년 봄, 나는 나 자신과 조용한 약속을 하나 했다.
아무런 용건이 없어도,
한 달에 한 번, 엄마를 만나러 가기로.

그 약속에는 거창한 의미도,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그저 엄마와 단둘이, 시간을 나누고 싶었다.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자주.
서로의 삶에 발을 담그고 싶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나는 한 시간 거리의 친정으로 향한다.
교통이 복잡한 날은 두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그 시간이 싫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늘 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보낸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함께 먹고,
그 계절 가장 달고 싱그러운 과일을 사드린다.
엄마 집에 도착하면
따끈한 커피를 내려 작은 잔에 나눠 담고,
소파에 앉아 눈을 맞추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날은 엄마가 손수 차려주신 집밥을 먹고,
어떤 날은 요즘 푹 빠지신 가수,
안성훈 님 이야기를 웃으며 들어드린다.
또 어떤 날은 한 번씩 엉뚱해지는 엄마의 핸드폰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고쳐드리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그저 평범한 하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매번 가슴 깊이 따뜻해지는
아주 특별한 하루다.

사실 이 약속을 실천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내 마음 어딘가엔 말 못 한 감정이 쌓여 있었다.
엄마도 미처 알지 못했을,
서운함과 섭섭함의 작은 잔해들.
사춘기 시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
언젠가 말해보고 싶었지만 꺼낼 용기를 내지 못한 마음들.

그러던 작년 봄,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혼자가 된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자라던 시절의 엄마가 떠올랐다.

그때 엄마도,
나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그 나이를 살아내던 사람이었겠구나 싶었다.

어린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틈조차 없이,
'엄마'라는 이름에 갇혀 하루하루를 버텨냈을 엄마.

그제야 나는
내 안에 꽁꽁 숨어 있던 서운함을
조금씩 놓아줄 수 있었다.

오래전,
내가 감정의 이름조차 모르던 시절
엄마 역시 감정에 이름을 붙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돌봄 받지 못한 채
그저 참고 견디며
어설프게 익어버린 시절의 열매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엄마는 더 이상 '엄마'라는 역할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낸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 마음도 조금씩 변해갔다.
지나간 서운함을 놓아주고,
그 자리에 따뜻한 감사를 채워 넣었다.

엄마를 향한 이해의 마음은
마치 오래 앓던 감정에
작은 마침표 하나를 찍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침표는
내 안의 오래된 사춘기를
조용히 끝내주는 표시이기도 했다.

요즘,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내 아이를 보며
나는 오래 전의 나를 떠올린다.

내가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
무심히 넘겼던 순간들이
아이의 말투, 아이의 눈빛으로
다시 내게 돌아오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따뜻하게 반응하는 엄마이고 싶다.

아이의 투정도, 응석도,
때로는 날카로운 말들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마음의 외침을 알아듣고 싶다.

감정의 온기를 건네는
마흔의 엄마이고 싶다.

엄마를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
아이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여유와 깊이를 갖게 되었다.

엄마도, 나도,
그리고 우리 아이도,
모두 각자의 속도로
처음 살아보는 인생을 건너는 중이다.

다만,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그 길 위에 있는 모든 날들이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계속해서
한 달에 한 번,
엄마와의 데이트를 이어가려 한다.

그 따뜻한 시간이
내가 품고 있는 또 다른 사랑을
아이에게 전해주는 다리가 되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