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 어린 엄마의 마음을 껴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마흔셋에 낳은 막내였다.
열일곱 살 터울의 외삼촌과 남매였으니,
엄마는 종종 "나 주워온 거 아닐까?" 하며 웃곤 했다.
그 말이 진담 같아 보여 웃고도 마음 한쪽이 짠했지만,
엄마 얼굴은 외할아버지를 꼭 닮은 판박이였다.
의심은 늘 얼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엄마는
학교가 끝나면 외할머니 손을 꼭 잡고
종로 1가에서 3가까지 일수 돈을 받으러 다녔다고 했다.
외할머니의 작은 체구는 단단했다.
여자의 일이 아니라는 말도 있었지만,
외할머니의 돈을 떼먹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남편, 외할아버지가 종로경찰서 형사였기 때문이다.
어린 나도 웃게 되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가 국민학교 5학년이었을 때였다.
백내장 수술을 받으러 들어간 외할머니는
그 수술 이후로 빛을 잃고 말았다.
하얀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수술실로 들어가던 엄마의 엄마.
그 뒷모습이,
엄마가 마지막으로 본 '눈 뜬 엄마'였다.
그날 이후 외할머니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아직 열 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에게
그 현실은 얼마나 두렵고 당황스러웠을까.
엄마의 작은 마음이
그 모든 변화 앞에서 어떻게 견뎠을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 딸이 국민학교 5학년이라 상상해 보았다.
순간 목이 메어 왔다.
그 시절, 내 엄마는 그 나이에
엄마의 눈을 잃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시력을 잃은 외할머니는
죠리퐁을 손끝으로 만져
"보리과자"라 불렀다.
내가 놀러 가면
자주 부르시곤 했다.
"○○아~ ○○아~ 보리과자 먹어~ 보리과자."
어쩌면 그 말속에는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말을 그저 반복된 소리로만 받아들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부름이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했던가 싶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이 조금 무서웠다.
앞을 보지 못하는 외할머니의 얼굴이 낯설었고,
손을 잡아드리는 것도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외할머니는 더 다정하게 내게 손을 내밀어주셨다.
그 손끝의 촉감,
부드럽고도 따뜻한 그 온기가
아직도 죠리퐁을 보면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해, 봄에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내 딸이 있는 그 나이에,
나는 처음 이별을 배웠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엄마는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냈다.
8년 전,
후두암 수술로 목소리를 잃은 아빠.
그 후 말없이 살아오시다
작년 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엄마는 어린 시절,
엄마의 '눈'을 잃었고
어른이 되어
사랑하는 남편의 '목소리'를 잃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토록 두 번의 큰 상실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 어린 마음은 얼마나 무너졌을까.
그 이후의 날들은
또 얼마나 외롭고 고단했을까.
엄마는 말하지 않았다.
늘 말없이 견뎠고,
눈물도 조용히 감추었다.
그저 묵묵히 우리를 지켜냈다.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다.
엄마,
그때 많이 무서웠지?
많이 슬펐지?
엄마의 다친 마음을
이제는 내가 꼭 안아주고 싶다.
국민학교 5학년이던 그 어린 엄마도,
지금 내 곁에 있는
언제 그렇게 나이 들었나 싶은,
조용히 늙어버린 어른 엄마도.
어릴 땐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그 어둠 속에서도 나를 부르시던 그 마음,
그 부름 속에 담긴 사랑의 크기를.
이제는 그 손끝에 머물던 온기를
내가 기억하고 싶다.
내가 이어가고 싶다.
그리고 내 딸에게도,
그 따뜻한 사랑을 가르쳐 주고 싶다.
외할머니가 어둠 속에서도 다정히 불러주시던 내 이름처럼,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