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지기 엄마의 그림책 이야기 10]
[책방지기 엄마의 그림책 이야기] 아빠와 아이가 함께 한 한여름 밤의 책방 이야기
얼마 전 2년 반 가까이 쓰던 휴대폰을 바꿨다. 잔고장이 난 지는 좀 오래되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수리를 미루다 맘대로 전원이 꺼지는 일이 일어났다. 결국 새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어떤 제품으로 바꾸고 싶냐는 매장 직원 말에 나의 대답은 “카메라 좋은 것으로요” 실로 명료하고 단호했다.
6개월이 되어가는 내 아이는 요즘 엄마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졌나 보다. 머리카락과 얼굴을 자그마한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아이의 눈에는 엄마의 모든 게 참으로 신기하겠지. 혹여 아기가 잘못될까 머리를 질끈 묶고, 화장도 하지 않는다. 아기를 위해서이지만, 카메라에 비친 나의 ‘민낯’은 부정하고 싶은 요즘.
새로 장만한 휴대폰 카메라 필터에 내 모습을 이리저리 바꿔본다. 조금 더 화사하게, 조금 더 젊게, 조금 더 아름답게…. 아이처럼 젊고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내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어른이 되면서 사라진 걸까?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걸까? 어른이 된 나를 위로해 주는 카메라 필터는 없는 걸까?
◇ 애가 소품 만질까 노심초사…아! 여기 어린이를 위한 공간 아니었나
책방을 연 지 이제 두 달이 지났다. 6월, 정식 오픈을 하면서 전시 세 건을 동시에 준비했다. 그중 지브리 스튜디오와 함께 하는 전시는 베타 오픈부터 준비했던 터라 결과에 대한 심적 부담감이 컸다. 다행히 전시를 오픈하면서 많은 손님들이 책방을 찾아주었지만, 혹여나 소품들이 분실될까 긴장을 놓을 수 없던 어느 주말, 나는 책방 손님들 사이에서 전시를 관람하던 한 여자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걱정을 눈치라도 챈 걸까? 책방 매니저가 전시를 보고 신난 어린이 친구에게 “눈으로만 보세요”라고 말하며 주의를 시켰다. 그 순간이었다. 자그마한 두 손과 눈으로 자기만의 망원경을 만들어 조심스럽게 전시 소품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아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어린이 친구들을 위해 준비한 전시인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천진난만한 아이의 행동을 보며 내 안의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순수하지 못한 내 생각이 순수한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게 아닐까? 어른이 되어버린 내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모습을 가려줄 카메라 필터가 아니라, 마음을 정화할 필터가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몸만 크고 마음은 어린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순수했던 아이의 행동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아직도 동심 가득한 ‘어른이’가 되고 싶다면, 어린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 뒤로 나는 좀 더 아이의 시선으로 책방을 바라보게 되었다. 새로 산 핸드폰 카메라 필터에 의존할 게 아니라, 내 눈의 카메라 필터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다짐하면서. ‘조금 더 화사하게, 조금 더 젊게, 조금 더 아름답게’가 아닌 ‘조금 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조금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남을 배려하며’ 말이다.
◇ '어른이'가 되는 첫걸음! 아이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지난 26일 금요일 밤, 책방 문을 열며 위시리스트 중 하나였던 ‘SEA BOOK? SEE BOOK! 아빠와 함께 하는 한여름 밤의 책방’을 열었다. 아빠와 아이가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문화체육관광부 심야 책방 지원사업으로 현실이 되었다.
‘불금즐금, 엄마는 자유시간! 아빠와 아이가 함께 하는 시간, 한여름 밤 큰 책으로 큰 꿈을 꿔 보는 시간, 함께 빅 북을 읽고 바다 캔들을 만드는 책방 휴가’로 진행하는 행사. ‘사람들이 안 오면 어쩌지?’ 했던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엄마들이 이런 행사를 그동안 바라왔던 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행사 공지를 올린 후 사흘도 채 안 돼 마감되고, 추가 신청을 바라는 사람들까지 만났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늦은 밤이나 새벽에 SNS로도 문의가 올 정도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며 열 명의 아빠와 아이가 함께 한 금요일 밤. “행사하는 동안 친정엄마와 맛있는 저녁 좀 먹고 오려고요!”라며 아이를 데려온 단골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환했다.
이날 우리와 함께한 책은 「아빠가 되고 싶어」 (글과 그림 김동영, 키다리, 2020년), 「아빠, 우리 고래 잡을까?」(글 임수정, 그림 김미정, 노란돼지, 2017년) 빅 북 두권. 큰 책으로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고른 그림책의 주인공은 바로 아빠와 아이다.
내가 커서 아빠가 되면 아이와의 약속은 꼭 지킬 거야. 다음, 다음으로 미루지 않고 바로 ‘지금’ 지킬 거야. – 「아빠가 되고 싶어」 중에서
“아빠, 우리는 오늘 거북이도 잡을 수 있었고 무지개 물고기도 잡을 수 있었고 물뱀도, 피라냐도, 고래도 잡을 수 있었지?”
“그럼!” –「아빠, 우리 고래 잡을까? 」 중에서
약속을 꼭 지키는 아빠가 되고 싶은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아빠가 되고 싶어」, 빈 양동이로 돌아온 낚시 여행이지만, 그보다 소중한 아빠와 아이의 사랑을 소개한 「아빠, 우리 고래 잡을까?」까지. 아빠 곁에서 함께 그림책을 읽어 내려가는 아이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 보기 좋았던 금요일 밤의 책방이었다.
아빠와 함께 바다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빅 북 스토리텔링에 이어 다음 프로그램은 ‘아빠와 여름 휴가 계획 세우기’. 함께 여름맞이 휴가로 떠날 바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아이와 아빠는 분주하다. 스티커를 붙이고, 글자를 쓰며 계획표를 꾸미는 시간. 아이들은 벌써 휴가를 떠난 듯 들뜬 모습이다.
어떻게 책방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궁금해 물어보니, 아빠들의 대답은 이구동성으로 “애들 엄마가 신청해서 오게 되었다”라고. 다들 머쓱해 하긴 했지만, 이렇게 함께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며 고맙다는 인사도 하셨다. 둘만의 휴가 계획을 이야기한 후, 아빠와 함께 바다 캔들을 만들어 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빠와 빅 북을 읽고, 여름 휴가 계획을 세우고, 바다 캔들 만들기까지.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 조개, 모래, 물고기 친구 그리고 돌고래까지 병에 넣어 꾸며 보는 시간. 여기서 잠깐! 바다에 대해서도 배워 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하다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MARC)가 제작 배포한 ‘2019년 등지느러미 목록 Fin Book’을 아빠와 함께 읽는 시간을 행사 마무리에 마련했다. 아빠와 함께 소중히 지켜야 할 제주 바다 친구를 알아가는 시간. 이제 120마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남방큰돌고래 이야기를 나누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어른이’가 되는 첫걸음은 무엇일까? 아이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봄이 아닐까? 어른이를 위로해 줄 영혼의 필터가 필요하다면, 동화 파랑새처럼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가까이 우리 일상의 곁에서 찾을 수 있음을. '어른이' 책방지기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나날들을 기대해 본다.
*칼럼니스트 오윤희는 생일이 같은 2020년생 아들의 엄마입니다. 서울 도화동에서, 어른과 어린이 모두가 커피와 빵, 책방과 정원에서 행복한 삶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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