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지기 엄마의 그림책 이야기 13]
태어난 지 갓 8개월이 지난 아들 조이는 요즘 온 세상이 궁금한가 보다. 온갖 것을 입에 넣으며 이리저리 탐험한다. 이런 아기를 볼 때마다 귀엽기도 하지만, 24시간 노심초사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요즘 아기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바로 이 말이다.
“안돼!”
“조이야, 위험해, 안 돼!”
“조이야, 더러워, 안 돼!”
“조이야, 물면 안 돼!”
“조이야, 하면 안 돼!”
매번 “안 돼!”를 외치다 보니, 어릴 적 즐겨 부르던 동요 ‘피노키오’의 가사가 문득 떠올랐다.
‘우리 아빠 꿈속에 오늘 밤에 나타나 내 얘기 좀 잘해줄 수 없겠니. 먹고 싶은 것이랑 놀고 싶은 놀이랑 모두 모두 할 수 있게 해줄래.’ - 동요 ‘피노키오’ 가사 중에서
피노키오 모험담이 세상에 나온 지 130년이 지났건만, 어른이 된 지금까지 떠오르는 걸 보면 내게 무척 강렬한 기억을 준 그림책이었던 모양이다.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작품이라고 하니,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어른이 된 지금, 살다가 한 번쯤 피노키오를 추억하고 있지 않을까? 나도 마음껏 먹고 싶고, 놀고 싶고, 자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이라며 말이다. 엄마가 되니 더 ‘나만의 피노키오 모험’이 간절해진다.
8월 한여름 오후, 모처럼 주어진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 예술감독이 스페셜 도슨트로 나서는 ‘My Dear 피노키오 展’으로 향했다.
‘상상력이 좋아서 자꾸 거짓말하고 싶어요’를 부제로 단 이번 전시에서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그래미 어워즈 등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작가들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피노키오를 주인공으로 한 회화, 영상, 대형 조형물, 그림책, 페이퍼 아트(Paper Art), 팝 아트(Pop Art) 등의 작품 190여 점이 전시돼있어 피노키오를 사랑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피노키오를 만든 창조자이자 ‘피노키오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카를로 콜로디는 쉰일곱에 피노키오를 펴냈으나, 아쉽게도 피노키오가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모습은 못 보고 숨을 거두었다. 여기서 재미난 사실이 하나 있다. 카를로 콜로디가 생전에 “어른들을 즐겁게 하기란 너무 어렵다”란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피노키오는 지금 전 세계 어른들에게 오래 사랑받는 캐릭터가 되었다.
카를로 콜로디 소개에 이어, 전 세계에 출판된 피노키오 그림책들을 모아 놓은 섹션과 마주했다. 70년 넘은 팝업북부터, 각양각색 빈티지한 책들이 마치 “저 좀 봐주세요! 제가 진짜 피노키오라고요!”라고 외치는 듯하다. 피노키오를 주인공으로 다룬 그림책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함이 가득한데, 다양한 아티스트의 손에서 재탄생한 피노키오들이 연이어 관객들을 맞이한다.
이탈리아 출신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레오느라도 마티올리(Leonardo Mattioli)부터, 한국에서도 사랑받는 아동문학가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 이 외에도 이탈리아, 러시아, 스페인, 아르헨티나, 프랑스 등 다양한 나라의 아티스트가 만든 작품이 피노키오를 색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묘미를 더한다.
그중 내게 큰 영감을 준 아티스트는 바로 대한민국의 민경아 작가다. 민경아 작가는 20년 넘게 피노키오를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데, 그는 피노키오의 ‘자라나는 코’에서 질문을 시작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화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하회탈 등 동서양, 과거와 현재, 종교와 예술로 교차하는 화판 주인공의 코를 부각해 표현한다. 민경아 작가는 ‘코’를 신체적 특성이 아닌 ‘자아 정체의 상징’으로 접근한다.
내 신체의 일부인 코가 어쩜, 내 편이 아닌 남이 편인 것은 아닐까? 피노키오처럼 코가 자라나는 장면은 모든 인간이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약점’일지도 모른다는 작품 설명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모든 이들에게 ‘코’란 부정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이 세상에서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 전시장에는 우리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아티스트들의 명언과 문장이 여운을 더한다. 코로나19라는 위험이 도사리는 이 시대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길 수 있었다.
‘피노키오는 모두 몇 명일까?’ – 김하민
‘피노키오는 위험으로 가득한 여정을 가야만 한다. 그리고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지치지 않고 행복한 결말을 찾아 나아간다. 우리가 모두 그렇듯이.’ -우고 네스폴로
‘우리가 현시대에서 겪는 무차별적인 정보, 그리고 그로 인한 낮은 신뢰도에서 오는 혼란과 시야의 혼탁함을 피노키오가 겪는 여정 속에 녹여 과연 우리가 가는 길의 방향의 마지막은 어떨지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하고 있다.’ -조민서
세상에 피노키오는 얼마나 될까? 나도 피노키오일 수 있고, 당신도 피노키오일 수도 있는 세상에서 ‘피노키오다움’을 정의 내려 본다면, 과연 무엇이 정답인 걸까? 오래전, 피노키오가 사랑받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피노키오가 ‘말을 잘 듣는’ 어린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하는 격변의 시기에 요구된, 올바르고 말 잘 듣는 어린이의 표본이 바로 피노키오였다는 것.
하지만 이 표본이 21세기에도 유효할까? 말 잘 듣는 어린이가 어른이 되었다고 뭐가 달라질까? 세상의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을 얻고자 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어떨까?
2019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 대상 수상작이자, 2020년 한국-체코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소개하고 싶은 그림책 「피노키오, 어쩌면 모두 지어낸 이야기」(보이테흐 마셰크 글, 흐루도시 발로우셰크 그림, 김경옥 옮김, 우리학교, 2020)는 날실과 씨실처럼 엮인 질문의 꼬리를 매듭짓기에 좋은 책이다.
자두씨가 자두나무가 되고 나무토막이 되다가 대통령이 되었다가 꼭두각시 인형이 되면서 내가 자두인지 나무인지 토막인지 모르는 다소 혼란스럽기도 한 모험을 다룬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그림책의 기승전결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피노키오, 어쩌면 모두 지어낸 이야기」는 대체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선이고 악인지, 이중잣대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을 깨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내 안의 나를 찾아가다 보면, 이제는 몸도 마음도 커버린 어른일지라도, 내적 모험을 통해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My Dear 피노키오 展’을 뒤로 한 채, 한동안 이 전시가 내게 준 의미를 몇 번이고 되새기면 어릴 적 즐겨 보았던 영화 ‘Pinocchio, 1940’를 다시 보았다. 오랜만에 흥얼거린 OST ‘When you wish upon a star’ 가사가 가슴에 여운을 남겼다.
When you wish upon a star Makes no difference who you are
Anything your heart desires Will come to you
If your heart is in your dream No request is too extreme
When you wish upon a star as dreamers do
당신이 별에게 소원을 빌 때 당신이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거에요
당신의 마음이 꿈을 꾸고 있다면 어떤 요구도 지나치지 않아요
꿈꾸는 이들과 같이 별에게 소원을 빈다면요
8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이 영화의 주인공 피노키오는 단순히 코만 길어지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진실과 거짓 사이를 찾아 나서기 위해 모험을 떠난 모든 이들의 친구가 아니었을까? 모험이 두렵다고? 미리 걱정하지 말자. 분명 실수와 위험이 뒤따르겠지만, 피노키오의 모험처럼 빛나는 우리네 인생을 마주하는 날이 올 테니 말이다.
나만의 피노키오를 찾아 떠난 짧지만 긴 여행, ‘My Dear 피노키오 展’. 이제 내 아들만의 피노키오를 만날 시간을 준비해야겠다. 피노키오를 기다린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 하나 더하면, 배우 톰 행크스가 디즈니 실사 영화 피노키오에 출연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머지않아 아이와 새로운 피노키오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다음 만남을 기다려 본다.
*칼럼니스트 오윤희는 생일이 같은 2020년생 아들의 엄마입니다. 서울 도화동에서, 어른과 어린이 모두가 커피와 빵, 책방과 정원에서 행복한 삶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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