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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이 있던 1월 첫 주,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아이와 함께 그림책 『눈 오는 날』을 읽었다. 이 책은 1963년 칼데콧 수상작으로, 흑인 아이를 그림책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최초의 작품이다. 오래된 책이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미가 깊다.
강렬한 색 대비와 콜라주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눈 오는 날 아이의 마음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눈 내린 풍경을 처음 마주한 아이의 놀라움과 신비로움,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잠시 스쳐 가는 슬픔과 걱정까지. 다양한 감정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나의 어릴 적 기억까지 함께 떠오르는, 동심 가득한 이야기다.
아이와 책을 읽으며 우리는 스키장에 갈 날을 기다렸다. 이 책은 스키를 타러 갈 아이에게, 먼저 눈과 친해지는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림책 '눈 오는 날' 표지. ©네이버 도서
며칠 뒤, 아이와 함께 처음으로 스키장에 향했다. 처음 보는 풍경에 낯설어 하면서도 아이는 헬멧과 부츠를 차분히 착용했다. 스키는 무거웠을 텐데도, 아이는 그 위에 잘 서 있었다. 첫 스키 강습이라 울기만 하다 돌아오지는 않을지 걱정했지만, 아이는 리프트를 타고 무사히 첫 슬로프를 내려왔다. 종종 넘어지기도 했지만 다시 일어섰고, 웃었다.
그렇게 세 시간 동안 여덟 번의 슬로프를 내려오고, 부츠를 신고 점프도 하며, 온몸으로 스키를 즐겼다. 처음은 서툴고 넘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걸, 아이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림책 『눈 오는 날』속 아이처럼, 미끄러짐을 실패가 아닌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키를 ‘잘 타는 것’보다, 눈 위에 서 보는 일이 먼저라는 사실을 아이는 스스로 배우고 있었다.
그림책 '너 스키 탈 수 있니?' 표지. ©네이버 도서
이 경험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그림책 『너 스키 탈 수 있니?』로 이어졌다.
이 책은 『눈 오는 날』의 작가 에즈라 잭 키츠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에즈라 잭 키츠 상’ 수상작이다. 그의 유언에 따라 1986년부터 매해 새로운 작품을 선정하며, 어린이의 일상과 감각, 사회적 메시지를 섬세하게 담아낸 그림책들을 소개해 왔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꼬마 곰이다. 아빠와 친구들이 반복해서 말하는 “너 스키 탈 수 있니?”라는 질문에 혼란스러워하지만, 이는 사실 “Can you hear me?”라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이야기는 청력검사와 보청기 착용 과정을 통해, 꼬마 곰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듣고’ 이해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 난청 경험을 바탕으로, 청각장애를 감정적으로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루며 다름을 존중하는 태도를 전한다.
이 책은 제목과 달리 스키 실력을 묻지 않는다.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 판단하고 가능성을 좁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도전에는 각자의 속도와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전한다.
책 속에서 스키는 능력의 기준이 아니다. 시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 빠르지 않아도, 자주 넘어져도, 멈췄다 다시 가도 괜찮다. 이 메시지는 장애가 있든 없든, 모든 아이에게 필요한 이야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는 웃으며 말했다. “스키 탔어요. 재밌었어요.”
그 말 속에는 넘어졌던 순간도, 멈춰 섰던 시간도 함께 들어 있었다. 잘했는지, 얼마나 내려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눈 위에 서 보았다는 기억, 다시 일어나 보았다는 경험이 아이 안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
아이를 응원한다는 것은 속도를 묻지 않는 일이다. 앞서 가라고 재촉하지 않고, 넘어짐을 실패로 이름 붙이지 않는 것. 그저 곁에 서서 “해봐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일이다. 눈 위에 섰던 그날, 아이는 스키를 배운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설 수 있다는 감각을 몸에 남겼다.
아이는 스키장을 나오며 다시 말한다. “엄마, 또 스키 타러 가요.”
나는 그 말이, 아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천천히, 넘어지며, 다시 일어나는 방식으로. 그 작은 시작을, 오늘도 조용히 응원한다.
아이의 첫 스키 강습 영상 ©오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