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소설집
'김애란 작가를 좋아해요'' 라고 말한 독자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소설 <비행운>을 이제서야 읽었다. '항상 읽어야하는데...'라는 말만 앞섰지, 행동으로 실행하게 된 건 순전히 장시간 비행기를 탔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니 비행운을 읽어야지.' 라는 약간은 터무니 없는 핑계 겸 동기로 드디어 책을 손에 쥐었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나는 비행운이 그저 비행소녀 혹은 비행기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전제로 한 소설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예측이 전혀 빗나간 건 아니었다. 다만 이게 '비행기 화장실'이 주 소재가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이런 예측이 김애란 작가의 매력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 기간 동안, 혹은 지금까지 여행을 다니면서 누군가에게는 말 못한 부끄러운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이건 인간 본연 자체의 궁금증이지만, 어디 가서 말하면 어이 없어할 궁금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난 어디를 가든 화장실이 좀 중요한 사람이다. 변비나 설사 이런 건강상의 이유가 아니라, 그냥 화장실의 청결이 늘 관심사였다. 그래서 병원, 백화점, 호텔, 공항과 같은 화장실을 선호한다. 누가 가든 기분 좋게 만드는 장소가 되어주고, 소설에 나온 것처럼 조명발이 좋아서 셀카가 잘 나온다.
역으로 '왜 화장실이 이래야 하나?' 궁금증도 있다. 이번 계란파동만 해도 그렇다. 닭은 진드기를 퇴치하기 위해 흙목욕을 하고, 돼지는 진흙목욕을 한다. 이걸 강제적으로 금하면 부작용이 일어난다. 가끔 올케 개를 산책시키는데, 응아를 하면 나는 금새 그걸 집어들고 그 흔적을 지운다. 개는 본능적으로 후각이 발달해 있는데 이렇게 치워버리는 게 맞는가? 이게 자연의 이치에 맞는건가? 싶다.
사람은 어떠한가? 사람 또한 동물이고 또 변을 보고 또 흔적을 남긴다. 이 흔적을 강제적으로 사라지게 하고 숨긴다고 사람의 본능이 사라지나? 본능에 충실한 곳에서 왜 가장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걸까? 이런 궁금증이 꼬리물기를 하다 읽은 비행운은 참 안쓰럽다 못해 이리도 우리 사회의 이면을 잘도 표현하는가라는 칭찬을 김애란 작가에게 보내고 싶어지는 작품이었다. 더불어 여성탈모의 사회문제까지.
앞서 소개한 후기는 비행운에 수록된 작품 중 <하루의 축>을 중심으로 나열한 후기다. 물론 이 책에는 이 작품 외에도 일곱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모든 작품의 후기를 남기고 싶지만, 생각나는 것만, 그리고 내가 남기고 싶은 것만 남겨 보고자 한다.
모든 작품이 휼륭했지만, 수록된 단편 중 또 하나 인상적으로 남은 작품은 <큐티클>이다.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하루를 나도 보냈기 때문일까? 사회생활을 하고 네일아트를 받은 건 사수 때문이었다. 퇴근 후 나를 데리고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에 데려가 내 손에 검정을 물들여 주었다. 반짝였고, 화려했다. 안 그래도 안 이뻐서 관심을 두지 않던 손에 조금씩 눈이 가기 시작했다. 큐티클을 제거하니 내 안의 잡음을 제거하는 것 같았다. 뭔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조금씩 내 스트레스를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친구의 부케를 받을 일이 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나는 네일아트를 했다. 신부만큼은 아니지만, 나 또한 이 정도는 누릴 영광은 있다고 자부하면서 말이다.
몇백 원 더 비싸지만 부드러운 국산콩 두부를 먹고, 호기심에 일반 생리대보다 두 배는 비싼 유기농 소재의 패드를 써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좀 죄책감이 들었다. 생필품을 절약하지 않으면 돈 모으기가 힘든데. 씀씀이가 커 눈만 높아진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변기에 앉아 화장지를 끊을 때마다, 부드러운 두부 조직이 식도를 건드릴 때마다 전에 없던 설렘과 만족이 찾아왔다. 그리고 만약 그런‘기분’도 구매할 수 있는 거라면 그걸‘계속하고’싶다고 생각했다. ('큐티클' 중에서---p.212)
소설 속 문장처럼, 지금의 난 조금 더 비싸도 좋은 걸 쓴다. 이걸 다시 말해 스몰 럭셔리 Small Luxury*라 부른다고 하는데 아마 내가 좋아하는 맥주가 그런게 아닐까 싶다. 조금은 비싸도 맛있는 맥주를 찾다 보니 이제는 값싼 맥주는 내 돈주고 안 마신다. (물론 아쉬울 때 마신다.) 소설 속 주인공은 네일아트에 스트래치가 나자 가슴 아파한다. 가방 안에 넣어둔 부케가 찌그러져도 내 손이 더 중요하고, 비싼 네일아트를 하고 편의점 캔맥주를 마시는 이 아이러니함에 쓴 웃음이 났다.
*스몰 럭셔리: 명품 자동차·의류·가방 등을 사는 대신 식료품, 화장품 등 비교적 작은 제품에서 사치를 부리는 것
또 다른 단편 <호텔 니약 따>에서는 여자 친구 둘이 떠나는 해외여행 에피소드를 담았다. 친하다고 여행가면 안된다라는 사실을 제대로 일깨워준 소설이다. 더불어 연애 후 겪는 이별의 아픔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었다.
“너 나 만나서 불행했니?”
그러곤 곧장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저쪽에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초조해진 서윤이 황급히 변명하려는 찰나 경민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
“그런 거 아니었어.”
“……”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호텔 니약 따' 중에서---pp.276~277)
여행을 가면 유독 마음을 주었던 이가 생각난다. 안하던 전화를 하고 싶고, 답을 확인하고 싶다. 이성적으로 그러면 안되는데 하고 후회한다. 물론 지금의 나는 절대 그런 유치한 행동 따윈 하지 않는다. 몇번의 실수로 성숙했고, 그만큼 성장했고, 또 자존감이 높아졌으며, 무엇이 중요하고 옳고 그른지 아는 30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잇값이라 부르는 게 이런 것인가?)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서른' 중에서---pp.293~294)
서른... 당신이 서른통을 앓았다면 이해할 문장이다. 노량진, 공무원 시험, 다단계.... 공무원보다 공시생이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녹아든 작품이다. 문장의 전개가 독백이라 더 좋았다. 가볍게 떠난 미국 여행에서 가볍게 읽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내재한 고독함과 상실, 그리고 자아정체감, 이 모든걸 김애란 작가는 타고난 감각으로 문장으로 써내려갔다. 반론이 필요 없는, 그야말로 믿고 보는 엄지를 치켜 들게 만다는 작품이다. 이틀만에 다 읽어버릴만큼 속도감도 만만치 않다. 신간 <바깥은 여름>도 다 읽고 말았다. 이제 남은 건 <달려라, 아비>뿐. 조금은 더 버티다 읽고 싶은데 안 되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