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지기 엄마의 그림책 이야기 01]
2020년 1월 3일. 이틀이나 이어진 유도 분만의 고통과, 아가를 기다리느라 애타는 마음이 교차했던 겨울밤. 나는 나와 생일이 같은 아들을 낳았다. 36번째 나의 생일은 두 배의 기쁨과 축하가 함께한 하루였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자그마한 아가를 마주하니 2019년 3월 결혼, 4월 임신, 5월 책방 창업,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 280일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여행작가로 일하며 책방지기를 준비하던 내게 임신은 '아직'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모두에게 축복받은 임신이었지만 그로 인해 좋아하는 여행을 못 하게 된 아쉬움은 부정할 수 없었다. 불러오는 배를 어루만지며 책방 오픈을 동시에 준비하는 현실 또한 쉽지 않았다.
엄마가 된다는 건 암흑 속에서 빛을 찾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물론, 아빠가 된다는 것도). 말끔하지 않은 컨디션, 변해가는 체형에 생각이 복잡해진다. 요즘 나는 내려놓기를 많이 하고 있다. 처음엔 스트레스 없는 태교를 위해서였지만, 결국 내려놓지 않음으로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에 혼자 먼저 지칠까 봐 두려웠다. 혹은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다 탈이 날까 봐. 여자이자, 아내이자, 엄마로 내가 감당하고 지속해야 할 삶의 역할들에 긴 숨으로 잘해 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래에 대한 숱한 고민들로 임신 당시 일기장을 가득 채웠다. 일기를 적으며 ‘오는 사람을 나가서 맞이함’을 의미하는 마중처럼, 그저 아가를 잘 '마중'하는 일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깨달았다. 업무와 태교 사이, 일상과 여유 사이에서 밸런스를 지키며 출산까지 무탈하길 바라며 아가를 기다렸다.
책방을 준비하는 엄마가 아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태교는 바로 ‘책 태교’였다. 누구보다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담아 280일 동안 수많은 책을 읽어주며 아가와 교감했다. 엄마가 된다는 위대한 여정을 함께 하는 아가를 마중하는 일은 실로 쉽지 않았지만 귀하고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수많은 책 태교 중 으뜸을 고르라면 나는 「아가 마중」(박완서 글, 김재홍 그림, 한울림, 2011년)을 꼽는다. 이 책은 우리 주변 이웃들의 삶을 재치 있고 공감가는 글로 표현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박완서 작가의 그림책이다. 또한 이 책은 출간을 앞두고 별세한 작가의 유작이자 그녀가 살아생전 가장 아끼던 작품이기도 하다.
“골목 속의 작은 집 새댁이 아가를 뱄습니다. 처음으로 엄마가 되는 것입니다. 첫아기 맞을 준비가 대단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아가 마중」은 처음 아가를 맞이하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의 새로운 마음가짐을 글과 그림으로, 그리고 따스한 시선으로 풀어냈다.
'엄마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배 속의 아기에게 나누어 줘야 한다'라고 생각한 엄마는 세상까지도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담장 안의 집안만 생각했던 엄마는 담장 밖 신문 배달 소년에게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내고 악수를 하며 찬란한 하루를 선물한다.
'어떻게 하면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아빠는 아기 침대를 고치고, 방 안의 벽지를 바꾸고, 위험하거나 고장이 잘 나는 장난감이 없나 살핀다. 집 안의 모든 것이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한 아빠는 놀이터의 그네도 고친다. 아빠는 아기를 마음 놓고 마중하고, 마음 놓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랑하는 마음들에 대해 새롭게 눈뜨지 않으면 안 됨을 알게 되는 놀랍고 아름다운 발견을 하게 된다.
골목 속 작은 집에는 아기를 기다리는 엄마와 아빠 말고도 할머니가 있다.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 태어나고 죽음을 수없이 보아 온 할머니의 눈빛은 흐려지고, 살갗은 고목 껍질처럼 찌들고 깊게 주름졌지만, 아가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다. 어떤 선물보다 아가를 행복하게 하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으뜸가는 선물, 바로 ‘이야기’이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적부터 수많은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온 이야기는 어린이 속에 들어가 어린이의 꿈이 되고, 죽어 버린 이야기를 살려낸다. 할머니는 많이 늙은 것만큼 많이 지혜롭기 때문에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아기의 걸음마를 따라 아기에게 이야기를 건네며 한 마디 한 마디가 숨 쉬는 이야기를 선물한다. 오래오래 사는 동안에 터득한 지혜로, 보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비밀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사물의 비밀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참 맛임을 아기에게 알려준다.
「아가 마중」은 지난 12월에 개봉한 영화 '감쪽같은 그녀' 중 손녀 '공주'가 직접 쓴 동화 끝자락, 아기 삽살개에게 건네는 할머니의 따스한 말 한마디 “삽살개야,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한다”를 떠오르게 한다. 서로에게 낯설기만 했던 할머니와 손녀가 가족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며 따듯함을 선사했던 영화처럼 책의 마무리도 마음 한쪽에 훈훈함을 더한다.
입춘이 지났지만 온기로 세상을 채우기엔 아직 부족한 겨울의 끝자락이다. 추운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줄 그림책과 이 겨울의 끝을 보내보면 어떨까? ‘감쪽같았던’ 박완서 할머니의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이야기 「아가 마중」과 함께 말이다.
*칼럼니스트 오윤희는 생일이 같은 2020년생 아들의 엄마입니다. 서울 도화동에서, 어른과 어린이 모두가 커피와 빵, 책방과 정원에서 행복한 삶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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