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어느 날이었다.
들어야 할 강의도 없는 날인데 친구들이 보고 싶어 학교에 간 날,
가장 친한 녀석이랑 해도 지기 전에 교문 앞 주점에서 막걸리며 맥주며 구분 없이 술을 마셨다.
구름이 두껍게 하늘을 덮더니 금방 창문 밖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짧게 지나갈 비는 아니었다.
굵은 빗방울이 후두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알딸딸한 기분에 빗소리를 듣다가 농담을 나누다 이내 조용해졌다.
캄캄한 밤 속으로 나서며 우산을 폈지만 소용이 없었다.
술기운도 올랐고, 우리는 비틀대고, 하늘에선 빗방울이 선을 그리듯 이어지며 떨어진다.
눅눅해지기보단 아예 젖어버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기숙사 사는 친구를 데려다주려고 들어간 캠퍼스 안에는
사람은 없고 빗줄기만 가득 차서 가로등 빛무리를 죽죽 그어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신이 났다.
이 캠퍼스에 우리 둘뿐인가봐.
갑자기 밀려오는 이 정복감에 들뜬 뜨내기 둘이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인도에 고인 물을 한 번 밟고 그 다음 웅덩이로 펄쩍 뛰고.
우산을 높였다 낮췄다 하는 사이에 내 온몸에 비가 묻어도 개의치 않았다.
웃음소리를 크게 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빗소리가 더 크게 귓가에 울려서 아마 아무도 못들었을 거라 생각했는지.
그렇게 미친 듯이 방방 뛰며 비를 잔뜩 맞으며 더 멀리 가지도 않고
정말 친구가 살던 기숙사 앞까지만 가 크게 웃으며 헤어졌다.
혼자 언덕을 내려오던 길에도 빗소리는 계속 들렸지만 천천히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인데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웃고 비를 맞고 우산이 무의미하게 나는 푹 젖어 있었다.
누가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적절히 둘러댈 말이 없을만큼 나는 그냥 그 빗속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었다.
난 이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야하는데. 버스정거장까지는 30분을 걸어야하는데.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으며 생각했다. 내가 미쳤었나봐. 그런데 재미있었잖아.
비 오는 날, 촌동네로 향하는 막차에는 다행히 승객이 많지 않았고 나는 그냥 우산이 없던 사람인 척 하고 창밖만 바라봤다. 버스안에서 서서히 마르는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물웅덩이를 생각했다. 특별한 의미도 없는데, 특별한 기분을 느꼈던 나를 곱씹으면서.
그날 환상같은 빗속을 만끽한 친구와는 연락하지 않는다. 시절이 다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궁금하다. 혹시 너도 그날을 기억하는지, 그날의 기분을 가끔 생각하는지.
그날처럼 비가 갑자기 쏟아진 여름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치만 다시 오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잊고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밤공기의 색이, 그 빗방울의 촉감이, 첨벙이던 그 물웅덩이의 소리가
한장의 포스터처럼 마음에 새겨져 나만의 향수로 남아있다고 언젠가는 꼭 고백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