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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alm Jan 14. 2019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1시간이 채 안 되는 짧은 강연을 마치고 내 강연(이라고 부르기도 쑥스러운 그 시간) 후에 들은 질문 중에 하나였다.


"제 향후 계획이요? 제가 앞으로 갖고 있는 계획은 바로, 무계획입니다."
약간의 적막이랄 것도 없지만 무슨 소리일까 하는 표정으로 학생이 나를 쳐다봤다.


"제가 강연 중간에 보여드린 얄팍한 제 약력을 보셨겠지만, 간혹 어떤 사람들은 그 약력을 보고 제가 -소위 세상이 말하는- 엘리트코스를 밟은 줄 알더라고요. 엘리트 코스가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약력에 적힌 모든 기록들은 단 한 번도 제가 구체적으로 계획해둔 적이 없던 내용들이고, 제가 세운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계획해온 것들이 단 한 번도 제 뜻대로 이뤄진 적도 없단 얘기고요. 그리고 중요한 건 단 한 번도 쉽게 걸어온 길이 없었습니다. 가장 마지막 끝자락까지 노력한 결과로 겨우겨우 매번 얻은 결과들이었기 때문에 저는 애당초 제가 얻어낼 줄 몰랐던 그 결과들을 미리 플래닝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러니하죠?

  

제가 걸어온 시간들을 되돌아봤을 때 굳이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게 제 결론이 되었고, 저는 앞으로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계획도' 없습니다. 대신 오늘 하루하루 제대로 살아내는 게 유일한 계획이고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보여줄 유일한 루트네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 엘리트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엘리트라는 말이 반갑지도 않다.

그저 우리 중, 고등학교 때 입던 교복 브랜드 중 양대산맥 중 하나가 아마도 '엘리트'였고, 또 하나는 선경(SK) '스마트' 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알고 접한 단어가 엘리트일 뿐이지 나를 수식할만한 단어는 아니었다.  


어릴 적 난 내 꿈이 참 소박하고 소소하다고 생각했다. 내 유일한 장점이라면 오랜 기다림 끝에 어렵게 태어난 첫 딸내미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것쯤 된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가장 근본은 바로 건강한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난 일찍 결혼해 신랑이랑 아가랑 재미있게 '오손도손' 살며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게 내 꿈이었다. 누구보다도 작고 소박한 꿈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 꿈은 누구보다도 이루기 어려운 듯 느껴진다.

간혹 일 하다가 힘들 때쯤이면 나는 우스갯소리로

"아,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내 계획에도 없던 일이고, 꿈에도 생각지 못 했던 인생을 살아내느라고 내가 지금 혼란스러운 건지도 몰라."

라고 헛소리를 하곤 한다. 어쩌면 헛소리가 아닐지도 모르겠고.. 어릴 적에는 아이들이 좋아 무려 15년이나 주일 교회학교에서 초등부와 중고등부 교사로 봉사해왔으나 내 체질이 '양육'과는 전혀 다름을 깨닫고 그 마저도 멈춘 지 몇 해가 지났다. 멋모를 때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면 내 '자식' 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람'을 키워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양육했을 테니 어찌 보면 한 템포씩 늦은 내 인생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소박한 꿈일 줄 알았던 것들이 오히려 가장 간절함일 수도 있다는 걸 매 순간 온몸으로 터득하며, 매번 내가 직접 경험해봐야만 깨닫는 여자다.


실제로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간 적이 없지만 항상 계획 이상으로 채워져 왔던 게 내 감사 기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잘나지도 않고 특별나게 스마트하지도 않아 남들처럼 영리하게 사잇길이나 빠른 길을 찾아내는데 무디다. 천성이 그런 듯하다.


다만 진심이 통하는 사람들과 진실로 대하며 서로의 삶에 도움이 되어가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최대한 건강한 방법으로 채우려고 발버둥 쳐온 것 같다. 쉬고 싶은 생각이 들 땐 '격렬하리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쉬기도 하고, 내가 해낼 수 없다 생각이 드는 영역에서는 온전히 하늘에 내어 맡김으로 마음을 비우기도 한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내 인생은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내가 계획조차 하지 못한 방법과 시간들로 채워질 거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살아간다. 앞날의 일들은 안 보이지만 내가 걸어 지나온 시간들이 그 증거로 보여준다.


이 구절이 나를 가장 나 다운 계획대로 이끌어왔는지도 모른다.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간혹 이 구절을 보면 마치 삶에 지극히도 수동적이고 게으른 자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 한 후에야 빈 마음으로 내 삶 순간순간의 결과를 하늘에 맡길 수 있다는 걸 안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시험을 제대로 치른 후에 여한 없이 결과는 어찌나오든 따르겠다는 마음과 같다.

매 순간 시험을 치르는 마음으로 살아가니 긴장을 놓칠 수 없어 피곤함이 늘 따르기도 하다만..


2019년 올해의 나의 계획은, 역시 무계획이다.

그리고 내가 세운 무계획에 어떤 기대 이상의 계획들로 가득 채워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설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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