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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소리 Jun 06. 2024

나는 언제나 엄마여야 했다

멀리서 서로를 그리워하다

                 

 새벽 5시 공항으로 가는 첫 차를 타려고 밖으로 나오니 함박눈이 쏟아진다. 순간 흰 눈은 마음을 꿈결 같이 몽롱한 느낌으로 만들어 독일가문비나무가 바람에 너울거리는 숲 속에 서있는 듯한 신비스러운 마음이 들게 했다. 그러나 현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한 달 여 혼자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한다.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이 여정은 아이들이 보고 싶어 조바심하는 나의 마음을 읽은 그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사위가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아 딸이 초등학교 2학년과 5살 아이를 데리고 독일로 이사를 간 지 일 년 여가 다 되어간다.

 낯설고 물 설은 곳에서 아이 둘을 어찌 건사하는지 노심초사하다가 용기를 내어 나서는 길이다.

 공항에 도착하고도 비행기에 눈이 쌓여 한 시간이나 늦게 출발을 하였다. 막상 떠나려니 하루 세끼 해결할 일이 난감한 칠십 후반의 노인을 홀로 두고 떠나는 마음이 한없이 무겁다.

 “잘 다녀와”

 웃는 그의 눈이 애련하다. 이 쓸쓸한 마음은 뭐지? 더 오래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돌아섰다.

 비행기에 오르고 평소 12시간 걸리던 비행시간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서 14시간 만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 탑승하고도 잠을 못 자는 나는 4편의 단편 소설과 영화 한 편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 도착하고 출구를 향하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이를 만날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둘러 나섰다. 아이 둘이 뛰어와 안긴다. 작은놈을 안고 빙글빙글 돈다. 가슴이 뻐근하게 올라온다. 아이는 가만히 안겨 눈웃음을 짓더니

 “할머니, 어부바해 줘요.” 하며 응석을 부린다.     

 다음날부터 독일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침이면 잠자고 있는 둘째를 담요에 둘둘 말아 안고서 뒷좌석에 앉아 첫째가 다니는 외국인 학교까지 30분을 달려갔다가 또 30분을 달려 ‘한국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둘째를 깨워 옷을 입히고 간단한 아침을 먹이고 양치를 시켜 들여보낸다. 오후에는 역순으로 아이 둘을 데려 오면서 마켓에 들러 식료품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간에는 어떻게 했느냐고 딸에게 물으니 처음에는 자는 아이를 집에 그냥 두고 첫째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한 시간 여 만에 오니 밖으로 나와 계단에 앉아 울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가 잠에서 깨어났는데 넓은 집에 아무도 없을 때의 그 공포감이 느껴진다. 잠자던 이층에서부터 엄마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와 거실로 부엌으로 지하 빨래방까지 엄마를 부르며 찾아다니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후로는 나갈 때 TV를 켜놓았더니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한국에 있을 때는 어릴 때부터 매일 딸네 집으로 출근을 해서 아이를 키웠다. 딸이 병약하여 아이를 돌보지 못해서 할머니를 엄마처럼 따르면서 엄마와는 사이가 데면데면했었는데 신기하게도 둘째와 엄마사이가 많이 친근해져 있었다.

 ‘역시 엄마가 최고지 할미는 한 치 건너지’ 아이를 돌보느라 체중도 5킬로나 빠지고 힘들어서 링거를 맞으며 돌보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왠지 허망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래도 지금까지 늘 바라오 던 일이 아닌가, 마음을 이리저리 의지해야 하던 아이가 안쓰러워 항공권을 연장해 가며 계획보다 보름을 더 지냈다.

 집에서는 돌아오라는 SOS를 자꾸 보내며 ‘이제 AS는 끝났다’라는 말을 꼭 전하고 오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딸은 오히려 엄마 아빠가 자기를 키울 때 방치하듯 키웠으니까 오래오래 AS를 해줘야 한다고 반격을 한다.

 “비 올 때 엄마가 언제 우산 한번 가져다줬어요?”

 “운동회 때 쪽지에 엄마와 달리기가 나왔는데 엄마가 안 와서 울고 서 있으니까 선생님이 손잡고 달려주었지”

 “언제나 춥고 외로웠어요.”

 딸은 지금이라도 같이 살면서 그때 못준 사랑을 줘야 한다고 주장을 편다. 남편과 딸은 서로 자기를 살펴줘야 한다고 잡아당긴다. 아무리 밑으로부터도 존중받지 못하고 위로는 모셔야 하는 낀 세대라지만 엄마로 아내로 할머니인 나의 존재는 무엇일까 혼란스럽다.      

 나는 언제나 엄마여야 했다. 딸도, 손주도, 남편도 나에게서 엄마를 찾고 있었다.     

 다음날 사위와 내가 둘째를 데리고 마켓에 물건을 사려고 나섰는데 차 속에서 둘째 녀석이 불쑥 나를 따라 한국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할머니, 언제 가세요?” 하고 묻는다.

 “으응, 이제 두 밤 자면 가지,”

 “그럼 나도 할머니 따라서 한국에 갈까 봐요.”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왜에?”

 “여긴 지켜야 할 것이 많아서 너무너무 힘이 들어요.” 한다.

 “그건, 이제 네가 커져서 나이에 맞는 행동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힘든 거야.”

 "그래도 갈래요."

 "시간이 조금 지나면 편안해질 거야" 나는 아이를 다독여주었다.

 두 달 여 함께 있으면서 딸과 둘째 아이가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아서 질투까지 느끼며 그나마 안심이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를 따라 한국으로 간다니 갑자기 걱정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돌아오는 날, “엄마 고마워요” 딸이 눈물을 글썽인다. 둘째는 공항까지 의젓하게 가면서 ‘또 만나요 할머니’ ‘또 만나요’ 노래도 했는데 막상 출구로 들어서니까 할머니와 함께 간다며 다리에 매달려 떨어지질 않는다. 우는 아이를 떼어 사위에게 안기고 돌아섰는데 공항이 떠나가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할머니 가지 마아, 사랑해요.” “사랑해요” 비명을 질러댄다. 공항 천정을 울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눈물범벅이 되어 흐느끼며 비행기에 올랐다.

 ‘아가야, 할머니가 금방 또 온다고 생각하렴, 희망의 싹을 틔워놓으면 슬픔도 비켜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단다.’ 기도처럼 아이의 평안한 마음을 빌고 또 빌어주면서 돌아왔다.     

 한국에 도착하여 공항으로 마중 나온 그를 보니 이번에는 반가움의 눈물이 났다. 한 달이 두 달 여로 늘어났는데도 잘 버텨준 그가 너무 고마워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아기처럼 꼭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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