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건네준 하루

by 원울 wonwoul

출근길,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엔 오늘이 조금은 가벼울 것 같은 기운이 섞여 있었다.

아침 공기는 묘하다.
겨울에는 차갑게 몸을 움츠리게 만들고, 여름에는 이른 시간부터 숨을 덥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절이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바람 속에 알 수 없는 온기가 들어있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그냥 ‘괜찮은’ 온도.

그 온도는, 나를 조금 멈추게 한다.
그저 신호등이 바뀌기만을 기다리던 발걸음이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
오늘의 하늘은 구름이 부드럽게 흘러가고,
햇살은 과하지 않게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속의 잡음들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산다.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야 하고,
옷을 입고, 커피를 마시고, 버스를 타야 한다.
회사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고,
휴대폰 속 메시지와 메일함은
내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계속 상기시킨다.
이런 일상 속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은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 사치를 선물처럼 건네주는 순간이 있다.
바로 이런 바람이 불어올 때다.
잠깐이지만, 그 바람은 나를 지금 이곳으로 불러온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잠시 잊게 만든다.
대신 ‘지금 여기에 서 있다’는 사실만 남긴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나는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도 변한 건 없는데
기분이 조금 나아진 건,
아마도 그 바람 덕분이었을 것이다.


걷는 동안 생각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변화를 너무 거창하게만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하고.
인생을 바꾸려면 큰 결심과 엄청난 사건이 필요하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렇게 사소한 바람 하나로도
마음은 변할 수 있다.
기분이 좋아진 하루는, 분명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만들고,
그 선택이 또 내일을 조금 다르게 만든다.
그렇게 작은 변화들이 이어져서, 결국 큰 변화를 만든다.

예전에 어떤 글에서 읽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계절이 곧 당신의 마음이다.”
나는 늘 봄을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봄이 아니라 ‘봄 같은 순간’을 좋아했던 건 아닐까.
따뜻한 햇살, 부드러운 바람, 선명한 하늘 같은 것들.
그 순간들이 주는 기분이, 나를 살게 했다.

문득, 내 책 제목이 떠올랐다.
『지나온 계절은 전부 내 감정이었다』.
책을 쓸 때 나는 내 마음을 사계절 속에 담았다.
어떤 날은 겨울처럼 차갑고,
어떤 날은 봄처럼 새로웠다.
그리고 오늘 같은 아침은,
그 계절들 사이에서 불어온 바람 같았다.
잠깐이지만, 모든 계절과 감정을 한 번에 스치게 하는 바람.

그래서 이제는,
아침의 바람 한 번에도 마음을 열어두려고 한다.
그것이 하루를 바꾸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으니까.

오늘 아침 바람이 그랬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숨 쉬고 서 있었을 뿐인데,
마음 한켠이 환해졌다.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순간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이렇게 조용히 다가온다.
큰 소리로 알리지 않고,
그저 스치듯, 그러나 확실하게 내 마음에 남는다.

내일 아침에도 바람이 불어올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바람이 불어올 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내 하루 속에 오래 머물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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