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엄마의 손을 잡아주고싶은 내가.
한 달 만에 본가에 갔다. 오랜만에 본 엄마는 기력이 없어 보였다. 내가 남자친구만 달랑 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줄 알고 기대 않고 있었나 보다. 온 식구가 출가해버리니, 엄마가 요즘 외로움도 많이 타고 우울해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밥상을 차려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준비해 준 엄마. 내가 추위를 많이 탄다는 걸 알기에, 기숙사에 전기요 가져가라고 또 싸놓으셨다.
쓰레기 버리기, 집안 정리하기, 요리와 설거지, 자영업 일까지 모두 다 하는 엄마는 수고를 수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희생이 희생인지를 모른다. 그저 기뻐서 한다. 어렸을 적 엄마의 수고를 거절하면서 실랑이를 벌인 나는, 누군가를 챙겨주는 게 삶의 낙인가보다 하고 엄마를 인정하기로 했다.
수고해서 준비했는데, 받는 사람이 필요 없다 거절하거나 더 짐이 되었다는 둥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생각 들면 준비한 사람은 기운이 빠진다. 그래서 “기숙사에 전열 기기 가져가도 되나..? 이제 곧 여름인데 그냥 가져가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라는 말이 차마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엄마의 기쁨을 지켜주고 싶어서.
엄마가 사랑 주는 일을 그저 받기로 했다. 수고와 희생이 그분의 사랑법이라면 나는 그것을 받기로 했다. 조금 수고스러워 보여도 그저 감사하단 말 하기로 했다
요즘 “엄마의 원래 이름 찾기”, “중년에 청춘 찾기” 와 같이 ‘ㅇㅇ엄마’보단 자신의 이름으로 주변에게 불리는 것이 유행이다. 자식을 통해 꿈을 이루고 만족감을 얻기보단 자신의 삶에서 재밌는 것을 발견하고 꿈을 이루는 문화도 함께 간다. “엄마도 엄마의 삶을 살아. 우리 뒷바라지하는 데 힘을 너무 많이 썼어.”라고 말하면 엄마는 알겠다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는 잘 몰라하는 것 같다. 엄마도 다시 ‘나로 걷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엄마를 홀로 세우기보다는 갓난아기인 내가 첫걸음을 뗄 때 손잡고 웃으며 도와준 것처럼, 이제는 내가 엄마의 손을 잡아주어야겠다.
글을 쓰다보니 또 눈물이 난다. 엄마는 부르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울리는 사람이다. 감정에 북받치게 하는 사람이다. 감동을 주는 존재다. 그것 만으로도 참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이다.
한 달 뒤에 또 봐,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