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에서의 열흘 8
카스바는 현재 독특한 서민 주거지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술집이나 홍등가가 있는 할렘이기도 했다.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와나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에는 그때의 퇴폐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담겨있다. 우리나라의 성인가요 ‘카스바의 여인’도 그러한 맥락에서 붙인 제목일 듯. 그랬던 카스바의 분위기는 프랑스 식민지시대 말기에 이르러 독립운동의 기지로 거듭나며 급변한다. 이 광경을 담은 영화가 <알제리 전투(1966)>이다. 카스바와 센트로가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길을 걷다보면 그날의 격렬했던 현장을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우리가 카스바를 정화겠다!”
영화 <알제리 전투>에서 거리의 야바위꾼이었던 청년 ‘알리’는 처음으로 프랑스 경찰을 처단하며 이렇게 선언한다. 이로써 빈민주거지 카스바는 거대한 성이 된다. 카스바에서의 전투는 도심 게릴라전이었다, 압델 카데르가 황무지를 옮겨 다니며 게릴라전을 벌였듯이, 카스바의 독립군들은 좁고 복잡한 카스바의 미로에서 게릴라전을 벌인다. 카스바를 포위한 프랑스군과 포위를 뚫고 전선을 확장해가는 독립군의 공방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담고 있어서 훗날 CIA가 이 영화를 도심 게릴라전의 교본으로 삼기도 했다고.
‘역사상 가장 선동적인 영화’라는 카피를 다고 다니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로 착각을 할 정도로 생생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박진감과 선동성은 내용보다 생생한 재현 그 자체에서 나온다. 지금 보아도 믿기지 않는 이 사실적인 연출은 알제리 독립의 자축열기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 만나 이루어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알제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제작된 이 영화는 주연배우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든 배우가 비전문 배우이고 연인원 8만 명에 달하는 엑스트라 모두 현지주민들이다. 실제 알제리 전투의 지도자였던 ‘야세프 사디’의 원작을 토대로 하고 있고, 그는 직접 독립군의 간부로 출연하기까지 했다. 연출을 맡은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은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 자신 공산당원으로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바 있어 작품에 그 경험을 녹여 넣었고,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도 심장을 뛰게 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결코 재현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알제리 전투>는 개인의 재능을 넘어 시대의 공기가 빚어낸 걸작으로, '역사가 된 영화' 인 동시에 '영화로 남은 역사'이다.
알제리는 우리와 달리 자력으로 독립을 했고, 협력자들을 모두 처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두운 역사의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친일파와 위안부와 소녀상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알제리에도 현재진행형의 식민지 역사문제들이 있다. ‘피에누아르(검은 발)’와 ‘하르키(알제리 용병)’문제가 그것이다.
피에누아르 (검은발)
피에누아르는 아프리카에 정착했거나 이곳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을 의미한다. 검은 땅에 발을 담갔다는 뜻이다. 그들은 식민시대 알제리에서 대대로 특권을 누리며 살다가 알제리 독립 이후 프랑스로 피신을 해야했다. 대표적인 피에누아르로는 작가'알베르 카뮈',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철학자 '알튀세르', 그리고 가수 '엔리코 마시아스(앙리 꼬마사스)가 있다. 알제리인들은 그들에게 단호했지만 피에누아르들의 알제리에 대한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 카뮈의 경우 알제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알제리와 멀어진 경우이다. 알제리 독립이 한창 논쟁이 되고 있을 당시 프랑스에 있었던 그는 독립시키는 대신 자치를 인정해주자고 하는 어정쩡한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은 양쪽 모두로부터 외면 받았고, 그 결과 오늘날의 카뮈는 알제리와 묘하게 서먹한 관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전 세계인은 카뮈를 통해 알제리를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알제리에서는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가수 엔리코 마시아스는 알제리나 이슬람에서 사랑을 받는 피에누아르이다. 그의 데뷔곡 '안녕, 나의 조국'은 알제리를 떠나 던 날의 심정을 알제리풍 창법과 멜로디로 표현한 곡이고, 훗날 '내 어린시절의 프랑스'라는 곡으로 그는 알제리에 대한 그리움을 또 한번 노래했다. 엔리코 마시아스에 대한 아랍세계의 호감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2003년 칸다하르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남긴 1500개의 녹음테이프가 발견되었는데, 그의 메시지를 비밀리에 하달하기 위해 녹음된 이 테이프들 속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서방세계의 노래가 엔리코 마르시아의 노래였다는 것.
반대로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하는 피어누아르들도 있다. 그들은 알제리 독립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은 물론 오늘까지도 과거 알제리에서 갖고 있던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정치가는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전 대표 ‘장 마리 르펜’과 그의 딸 ‘마린 르펜’이라고 하는데, 현 국민전선당의 대표인 ‘마린 르펜’은 2012년 대선에서 올랑드에게 패한 바 있고, 현재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라고 한다. 알제리가 여전히 프랑스 영토라고 주장하는 피에누아르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지금의 현실이고,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속사정.
하르키 (알제리용병)
식민의 또 다른 그림자 ‘하르키’는 ‘피에누아르’와 반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알제리전투의 장기화에 대한 자국 국민들의 원성이 커지자 용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때 프랑스인으로 인정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참전한 알제리인, 즉 알제리안 프랑스군이 하르키이다. 하르키는 대략 8,9만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 절반은 알제리를 탈출하지 못한 채 처형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프랑스로 탈출했다. 그들은 프랑스인 대접은 커녕 난민취급을 당하며 오늘날까지 인종차별, 종교차별 속에 살고 있다고 한다. 페리선이 오가는 마르세이유를 중심으로 많은 알제리인이 불법체류를 하고 있기도.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히 처단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는 자국에 협력한 하르키들을 멸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심해지자 얼마 전 올랑드 대통령은 그들을 보호하지 못해 온 것을 마지못해 사과한 바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대선에서 극우 정치인의 딸 르펜이 당선된다면 하르키의 운명은 제자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끝으로 하르키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하르키의 후손인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 알제리 백인원주민 베르베르족 혈통인 그는 이중의 악조건을 축구로 돌파했다. 그가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마테라치에게 박치기를 했을 때 여러 말을 낳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이나 프랑스나, 여기나 거기나 다르지 않다. 유럽의 선진국이라도, 자력으로 독립을 했다 해도 식민의 그늘은 아직도 길고 어둡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 책임이 침략자에게 있으며, 몇 번의 사과나 몇 푼의 돈으로 그 죄를 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