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에서의 열흘 7 - 알제 카스바
센트로에서 내려와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걷는다. 해안도로인 ‘체 게바라 로’를 따라 왼편에 또 하나의 언덕이 있다. 센트로와는 달리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끼고 남루한 집들이 밀집해 있는 산동네. 이곳이 바로 알제의 또 다른 명소 카스바(성채, 주거지역)이다. 카스바하면 ‘카스바의 여인’이라는 성인가요가 가장 먼저 떠오르기도 하는데, 정작 카스바가 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카스바는 16, 17세기 무렵부터 북아프리카에 지어진 성채이다. 당시 이 지역은 제대로 된 독립왕조 없이 지역군벌과 바르바로이 해적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방어를 위해 해안가와 산골짜기의 산등성이 주변에 성벽을 두르고 그 안에 주둔지 겸 주거지를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벽은 사라지고, 토착민들에 의해 성 안의 주거지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남아있는 독특한 밀집형태의 산동네를 카스바라고 한다.
특히 알제의 카스바는 독특하고 고풍스러운 건물과 다양한 장식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모로코나 튀니지의 카스바에 비해 덜 관광지화 된 이곳은 자연스러운 시간의 흔적, 소박한 생활을 느낄 수 있는 한편, 한쪽에 허물어져가는 빈집들이 있어 오히려 관리가 필요가 상황이다.
카스바는 언덕 아래 시장으로 시작된다. 식료품, 잡화, 옷가게 등 작은 가게들이 양옆으로 빼곡하고, 상인과 손님들로 언제나 북적거린다. 헐리웃 영화에 이런 시장골목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이 자주 나오는데 직접 가 본 카스바의 시장 골목은 영화에서 본 것 보다 훨씬 혼잡하고 시끄러웠다. 한마디로 시장골목 전체가 만원버스 같다. 사람이 너무 많아 좌판이 잘 보이지 않다보니 상인들은 물건을 높은 문틀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 물건을 자세히 보거나 사려면 가게 앞에 선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 와중에도 상인들과 현지인들은 낯선 동양인을 보고 같이 사진을 찍어자고 하며 말을 건다. 여자들을 쳐다보기도 조심스러운 바깥 분위기와 달리 이곳에서는 남녀가 몸을 부대끼는 것을 피할 수 없고, 그 틈에 여인들도 낯선 동양인에게 호기심 어린 강렬한 시선을 던진다. 카스바에 들어서기 전에 안내인으로부터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았지만 이곳에서 정신줄을 잡고 있기는 쉽지 않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갈수록 골목은 차츰 한적해 진다. 공예품, 서점, 중고가전, 이발소 같은 덜 번잡하고 정겨운 가게들이 나온다. 주인들은 문 밖에서 기웃거리는 여행자들에게 안을 둘러보라 권하고, 구경을 한 후 엄지손가락이라도 들어 보이면 함박웃음으로 악수하고 포옹한다. 그렇게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빨려들어 가다보면 어느덧 골목에는 주택만 빼곡하다. 아이들이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들락거리는 일상의 공간. 점점 더 좁고 복잡해지는 골목을 걸으며 수 백 년의 손때가 묻은 대문과 창문에 시선을 빼앗기고, 열린 대문 틈으로 어둑한 집 안을 엿본다. 볼 것이 너무 많아 어질어질하다. 가난하지만 각박하지 않고, 복잡하지만 분주하지 않은 곳. 일상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는데도 비현실적인 느낌이드는 곳이 카스바이다.
그 안에서 나는 몇 번인가 길을 잃었다가 깜짝 놀라 서둘러 내리막길로 되짚어 내려왔다. 얼마 내려오지 않아 불쑥 나타나는 낯익은 골목, 이미 인사를 나눈 적 있던 사람들이 아직 그곳에 있다가 어제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난 듯 반갑게 인사한다. 짧은 시간 몇 번이고 같은 골목을 다시 만나고, 사람들과 더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보면 이곳에 들어온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마치 며칠 지낸 듯 착각에 빠진다. 순식간에 정들게 만들어버리는 카스바 골목의 마력이다.
불쑥 수많은 골방 중에 한 칸을 빌려 하릴없이 며칠을 지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치솟았다. 눌러 앉고 싶은 마음. 이것이야말로 여행 중에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정인 동시에, 시간과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 여행자에게 치명적인 위험신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 순간이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이대로 올라가다가는 발목을 잡힐 것만 같은 불안함에 서둘러 내리막길로 방향을 틀었다.
내리막길은 짧았다. 내려와 버린 것이 바로 후회되었지만 골목을 다시 찾아 가기엔 이미 어색해져 버렸다. 고백도 하지 못하고 혼자 접어버린 사랑처럼 카스바는 이미 내게서 멀어져 버렸다. 다음번에는 꼭 현지친구의 소개를 받아 이곳에 며칠 묵으리라, 옥상에 올라 모자이크 같은 카스바의 전망을 보고, 켓차우아 모스크로 매일 기도를 하러 가리라... 다짐하며 언덕길을 내려왔다.
그런데... 그 다음번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한발 더 가지 못한 게으르고 겁 많은 여행자의 핑계일 뿐. 멈추고 싶을 때 한발 더 가고, 두려울 때 잠시 더 머물 것! 카스바의 못다 본 풍경이 남긴 소중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