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걷기 5 - 20코스. 김녕~월정~세화~하도
바다는 편하지만 지루하고,
산은 힘들지만 변화무쌍하다고 여겨왔지만, 아니었다.
제주올레 20코스가 그 편견을 깼다.
17.4km의 해안길에 이토록 많은 바다가 있을 수 있다니...
19코스가 바다, 마을, 숲, 유적... 제주의 모든 것이 있는 길이라고 한다면,
20코스는 온통 바다, 바다, 바다... 제주의 모든 바다가 있는 길이다.
멈춰설 때마다 다른 바다가 보이고,
해안 곳곳에 숨은 옛 흔적들이 신비를 만들고,
거기에 관광지에서 조금 비껴난 한적함...
세상에 멋진 해변길이 많겠지만 여기 같은 곳은 없겠구나 하며
걷는 내내 제주 바다의 매력을 만끽했다.
그렇게 그저 바다를 걷고 싶던 나의 바람은
3일 차, 올레 20코스에서 남김없이 채워졌다.
신비의 바다
이른 아침, 마을 한가운데 폭낭을 만나 안녕을 빌었다.
'청굴물'. 도대체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그 이름에 호기심이 생겨
올레 화살표를 벗어나 찾아가 보았다.
섬에서 용천수가 솟는 모든 곳은 귀하고 신성하다.
태초에 원주민들은 용천수가 솟는 곳에 모여 살았고, 마을의 표시로 입구에 나무를 심었다.
용천수는 마을의 시작이고, 폭낭은 마을의 역사이다.
청굴물은 제주올레 동부 반바퀴 해안에서 본 용천수 중 가장 맑고, 모양이 멋진 용천수였다.
유난히 시원하여 치료를 위해 몸을 담그기도 하는 영험한 물이라고 하니...
지나온 김녕마을을 모든 것이 새삼 귀하고 신성하게 느껴졌다.
옛날엔 폭우가 내리고 나서 바다 속에서 분수처럼 물이 솟아 용천수라 했다는데
열흘 간 다니며 보니 분수는 커녕 곳곳에 말아붙은 용천수터 천지였다.
몇 십 년동안 전국민에게 팔아 온 생수를 생각하면 용천수가 마를만도 하지.
생수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제주바다에 용천수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야말로 신비로운 장관이었을 텐데...
밑도 끝도 없는 부질 없는 생각이 한참동안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청굴물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신비를 만났다.
이름하여 '도대불'. 옛날식 등대다.
작고 투박하고 단단한 고대유물과 같은 모양.
안내판을 보니 원래 네모모양이었는데 1960년 경 태풍에 허물어져
지금의 원뿔모양으로 다시 만들어졌단다.
저녁에 나가는 배가 불을 붙이고, 아침에 들어오는 배가 불을 껐다고 하니
원래 모양이야 어쨌던지 간에, 충분히 신성하다.
그 안에 수많는 어부들의 기도를 머금고 있으므로.
다만 굳이 바로 옆에 정자를 놓아 순수한 풍경을 망쳐버린
그 누군가의 만행이 안타까울 뿐.
오래 된 유물은 그때 그곳을 상상할 때 신성한 빛을 내기 시작하고,
상상 속의 장면은 눈으로 본 풍경보다 언제나 더 강렬하다.
유물을 두고 돌아서서 걷었던 길.
풍경과 상상을 곱씹어 나만의 추억을 빚으며 걷다보면
생수나 정자와 같은 씁쓸한 여운은 금새 잊혀진다.
별 것 없는 황량한 풍경을 꺼내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리는 이유는
그때 그곳에 나만의 추억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겠지...
김녕 바다
그렇게 추억을 만들며 걷는 사이, 바다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잔잔하고 편안하기 그지 없으면서도
볼 때마다 표정이 바뀌는 묘한 매력의 김녕 바다.
지오트레일의 하이라이트인 용암지대도,
언덕 위 뜻을 알 수 없는 조각상의 쉼터도,
그리고 풍력발전기로 장식된 월정의 해안길도,
모두 바다, 바다, 바다...
며칠 머물러도 모자랄 곳을 한 번에 지나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내가 어쩌다 어기까지 왔단 말인가
월정을 지나 행원리에 이르러 비운의 남자, 광해 임금의 제주유배 첫 기착지인 어등포를 만났다.
강화도에 유폐되어 지낸지 14년 째 되던 어느날, 광해군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배에 실렸다.
대략 10시간에서 하루가 걸렸다는 강화도에서 제주까지의 뱃길.
광해군은 어등포 앞에 도착한 후에야 호송관으로부터 이곳이 제주도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듣자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강화도의 잿빛 바다와는 너무도 다른 옥빛 바다.
그가 보았을 그 바다에 서서 똑같은 말을 되뇌어 보았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행원은 20코스의 딱 중간. 종착지인 하도리까지 바다를 원없이 걸었다.
마을과 시간의 흔적과 바다...를 지나는 동안 머리 한 구석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 바람에 풍경은 더 이상 추억이 되지 않았다.
바다를 걷고자 했던 여행의 목적은 너무나 일찍 이루어졌고,
새로 받아 안은 질문은 너무나 크고 무거웠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모른 척 육지에 두고 온 온갖 기억들에 시달렸다.
완주도장을 찍는 순간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더 걸어야 하나? 무엇을 위해서?
어렵게 찾아낸 숙소는 멀기만 했고,
해는 빠르게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