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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Sep 20. 2018

아침산책은 언제나 해피엔딩

고맙다 여행 - 오키나와 모토부 편

세계 어딜 가나 가장 조용하고 안전한 시간은 이른 아침이다. 가족여행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여행을 갈 때마다 반드시 한 번 이상 아침산책을 한다. 일행을 깨울까 조용히 옷을 걸치고 숙소를 나서 마음 가는대로 걷는다. 그곳의 공기를 온몸에 담으며 시간이 허락하는 한 멀리 나갔다가 길을 되짚어 돌아온다. 돌아올 때, 갈 때 본 풍경을 다른 방향에서 보며 걷노라면 낯선 여행지가 새로운 일상공간으로 변해가는 느낌이 든다. 방금 도착한 곳을 한 바퀴 돌아 여기 온 지 며칠 된 사람처럼 숙소로 들어오는 순간은 언제나 뿌듯하다.   

      

달이 지는 새벽    


제일 기억에 남는 새벽산책은 사이판 해변 길이었다. 컴컴한 새벽, 비만한 원주민들의 운동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국적인 해변 길을 걸었다. 선선한 바람에는 정체모를 꽃향기가 감돌고 있었고, 검은 바다 위로 보름달이 지고 있었다. 달이 지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달도 지는구나... 하며 잔잔한 바다 위에 달빛이 길게 드리워진 광경을 지켜보았다. 달이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바다가 어찌나 하얗게 불타오르던지, 달빛으로 날을 밝히려는 건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다. 달이 수평선 아래로 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산책로를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오지 않았다. 달이 수평선과 만나기 전 하늘이 밝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달은 찬란한 빛을 순식간에 잃고 낮달이 되어 허공에서 서서히 사라져갔고, 달빛과 함께 바람과 꽃향기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돌아오는 길 내내 달빛으로는 어둠과 싸울 수 있을 뿐 그 빛으로 새날을 밝힐 수 없음을, 그리고 어둠 속 구원의 빛이었더라도 새날이 오면 작은 빛조차 될 수 없기도 함을 생각했다. 간밤의 수고에 대해 생색 한번 내지 않고 사라진 것을 보면, 달은 사람들이 어두웠던 나날을 얼마나 쉽게 망각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빈손으로 나간 탓에 바다 위에 드리운 달빛을 사진으로 담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시간과 빛, 바람과 향기는 지금도 더없이 생생하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힘든 여정으로 아침 일찍 눈이 떠지지 않을 때 그날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키곤 한다.     

 

산간 마을 새벽산책   

 

오키나와 여행 이틀 째 숙소는 모토부의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 일본식 2층 목조주택을 개조한 것이었다. 산이 해를 가려 아침이 늦게 밝았고, 쾌청한 하늘이 무더위를 예고하고 있었다. 가장 쾌적한 시간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온 산의 크고 작은 새들이 모두 동네로 내려와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침산책 최대의 적인 끈 풀린 견공은 없었다. 주변 게스트하우스와 농가를 둘러보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풀숲에 덮여 길이 사라지고 있었다. 몇 발짝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원시림의 정적이 감돌았다. 열대우림의 풀숲은 아무 지식이 없는 내가 봐도 뱀이 나오기 딱 좋아보였기에... 미련 없이 뒤돌아 내려왔다.     


반대편으로 걷다 아무도 없는 마을회관을 만났다. 지붕에 달린 여러 대의 확성기와 커다란 비상종은 자연과 싸워 온 오랜 세월의 증거였다. 유리문에 얼굴을 대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일본 본토에 맞춰 한 시간 늦게 가고 있는 벽시계. 태풍이 불 때는 예보가 한 시간만 빗나가도 치명적인 모양이었다.     

산길 옆으로 낮게 엎드린 집들이 등성 듬성 놓여있었다. 오키나와에 우리나라 7,80년 대 분위기의 시멘트 가옥이 많은 이유는 땅 속에 석회석이 많기 때문이라고. 없는 것을 들여오기보다 무엇이든 가진 것으로 삶을 꾸려가야 하는 것이 섬의 운명이다. 집도, 담도, 길도, 무덤조차도 모두 시멘트. 낮게 낮게 요리조리 쌓은 시멘트벽에 간절한 마음과 세월이 묻어 있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갈 때보다 가깝다. 내리막길인데다 언덕 아래로 먼 바다가 보여 발길이 더 가벼웠다.  동네 아저씨 한 분이 마당에 나와 시든 야자수 잎을 잘라내기 시작하고, 아침잠 없는 여행자들이 게스트하우스 문 밖에 나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들과 나누는 아침인사야말로 여행지에서만 감행할 수 있는 즐거운 모험. 

가족들은 아직도 단잠에 빠져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조심조심 걸어 테라스로 나와 오늘의 여행을 가늠하는 동안, 이미 뜨겁게 달구어진 해가 산봉우리 위로 떠오르고, 이슬이 증발하며 마을을 후텁지근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바다 마을 새벽산책    


다음 날 아침, 숙소인 바닷가 리조트를 나섰다. 어제보다 조금 늦게 나왔더니 벌써부터 빛이 뜨거웠다. 그날의 산책은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다. 방풍림으로 심어놓은 활엽수들이 자라 예쁜 숲을 이루고 있다는 비세자키 가로수마을. 사진만 봐도 모기가 많을 것 같아 아이들을 생각해 여정에서 제외한 곳이라 혼자서라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10여분 걸어가니 마을 입구가 나타나고,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초록터널이 시작되었다. 마을을 삼켜버린 우거진 가로수들이 작고 낮은 집들을 계속 짓누르는 중이었다.     


마을을 관통하는 가로수 길은 물론 집과 집 사이사이 작은 골목들에도 가로수가 가득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시간이 지나면 무덤덤해지기 마련이지만, 이곳의 가로수 길은 바다로 이어진 작은 골목들까지 모두 초록터널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몰려오기 전 온전한 초록 풍경을 즐길 수 있어 더 좋았다. 다음에 오게 되면 숲 속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것도 괜찮겠구나...     



가로수 골목에서 빠져나오니 조용한 바다가 나타났다. 말 그대로 자연 그대로의 바다. 어제 리조트 옆 해수욕장에 갔다가 너무나 밋밋해 실망이 컸는데, 역시 보물은 발품을 팔아야 하는 곳에 숨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숙소를 향해 방파제 길을 따라 돌아오기 시작했다. 왼편은 비세자키 마을, 오른편은 바다. 마을 안 숙소에 묵었더라면 초록터널을 들락거리며 바다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일상과 자연이 아기자기하게 얽혀 있기는 바닷가도 마찬가지여서 자주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관광객을 최대한 배려하면서도 공동체의 생활을 지켜나가고, 치열한 생존과정 자체가 멋진 풍경일 수 있음을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오키나와의 진짜 매력임을 깊이 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날은 바다를 건너는 대교 아래에 있는 인공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반신반의 하는 가족들을 설득하여 아침에 보았던 바닷가로 끌고 갔다. 여기도 밀물 썰물이 있는지 물이 빠져 있었다. 건너편 작은 섬을 걸어서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적어 아침보다 풍경은 덜했지만 아이들이 놀기엔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장소를 추천한 죄로 제일 먼저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 속의 풍경은...   


  

그곳은 물 밖에서도 산호와 열대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천연수족관이었다. 모두 그 광경을 보는 순간 탄성을 질렀고, 우리는 수족관의 불편한 진실을 의식할 필요 없이 탁 트인 바다에서 열대어와 함께 마음껏 놀았다. 바다와 물고기, 숲과 일상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시간이었다. 그날 오전은 이번 오키나와 여행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침산책의 소득이었기에 매우 뿌듯했다.


오키나와 모토부에서의 아침산책은 피곤한 몸을 일으켜줄 또 하나의 좋은 기억으로 남아었다.

고맙다 모토부, 고맙다 아침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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