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여행 - 오키나와 편
흔치 않은 조합의 두 가족
지난 달 오키나와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막내 외삼촌이 비트코인을 팔아 공돈이 생겼다며 두 식구의 가족여행을 쐈다. 비트코인은 물론 주식마저 투기로만 여겨온 내가 그 투기의 수혜자 될 줄이야. 내가 글과 씨름하는 동안 매일 숫자를 보며 인내를 시험 당했을 삼촌에게 심심한 감사를. 사실 나에게 삼촌은 오랜 여행 친구이기도 하다. 중국의 윈난, 청도, 그리고 지리산 종주를 함께 했다. 언젠가는 그 여행들에 대한 기억도 이곳에서 되짚어 보게 되기를.
외삼촌은 나보다 불과 2살 많다. 엄마가 누나를 낳고 나서 5달 후에 외할머니가 막내 삼촌을 낳았다. 삼촌과 한 동네에서 산지는 7년여 되었는데, 무의식중에 형이란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편하게 지낸다. 문제는 삼촌이 나보다 10년 늦게 결혼을 했다는 것. 그 바람에 두 식구의 촌수와 나이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외숙모는 나보다 세 살 적고, 아내는 나보다 한 살 연상이다. 그리고 삼촌의 딸은 7살, 우리 딸은 15살이다.
삼촌 딸은 40살 많은 나를 오빠라 부른다. 아내는 이모, 딸아이는 언니라 부르면서 왜 나만 오빠가 되었는지... 수영선수 출신의 엄마를 닮은 그 아이는 체력과 운동신경이 좋고 승부욕도 강하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언제나 과격한 장난을 치고 싶은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는 나는 장난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가며 그 아이가 어느 정도까지 감당하는지를 관찰한다. 장난은 대개 울기 직전 끝내는데, 도를 넘어 눈물과 원망으로 끝나는 민망한 날도 적지 않다.
세상 무서운 것 없는 그 아이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촌수로 따지면 조카이지만 언니라 부르는 중학생 딸아이다. 집요할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한 삼촌의 딸은 중학생 언니 한마디면 무엇이든 두 말 않고 포기한다. 질풍노도 딸아이의 정상참작 없는 단호함과 언니라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7살 아이를 긴장 타게 만드는 것이리라. 아이들 사이의 위계와 흠모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귀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흔치 않은 조합의 두 식구, 여섯 명이 오키나와로 떠났다. 그 결과는... 예민한 삼촌은 외숙모에게 짜증을 내고, 7살 아이는 엄마인 외숙모를 상대로 고집을 부렸다. 그런 삼촌과 아이를 내가 괴롭히고, 아내는 외숙모의 눈치를 보며 내가 오버하지 않도록 자제시키는 한편, 아내와 나는 딸아이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주의를 주고, 7살 아이는 중학생 언니 앞에서 최종적으로 고집을 꺾는 어지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모두의 관계를 먹이사슬로 그리면 결국 맨 밑바닥은 내가 되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여행은 나에게 오지여행보다도 어려운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하 공항, 뜻밖의 풍경
여행지로 오키나와를 선택한 건 순전히 아이들 때문이었다. 적정한 예산에서 위생과 편의를 고려해 고른 곳이 오키나와였다. 한참 일본 애니에 빠져 있는 중학생 딸아이가 일본문화를 몸으로 체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10년 전 촬영 차 동경에 갔을 때 일주일 내내 적진에 들어간 기분에 휩싸여 기념사진 한 장 찍지 않았던 나였건만... 그 뜨거운 반일감정도 딸 앞에서 흐물흐물해져 버린 것이다.
먹이사슬 관계와 더불어 그곳이 일본이었으므로 여행지에 대한 설렘이나 기대는 별로 없었다. 그저 싸이판과 제주도를 섞어 놓은 휴양지가 아닐까 막연히 예상해 볼 뿐. 다른 식구들이라도 건강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면 좋겠다는 뜨뜨미지근한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누가 불경기라 했던가. 크지 않은 비행기 안은 빈자리 하나 없이 가족여행객들로 가득했다.
오키나와 나하공항 근처에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가는가 싶더니 곧바로 활주로가 나타났다. 활주로가 바다로 열려 있어 마치 전투기를 타고 항공모함에 착륙하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사전지식이 없어도 애초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비행장임을 확연히 실감할 수 있는 구조. 다큐에서나 보던 바다를 향해 비행기가 뜨고 지는 풍경에 이유 없이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입국장 풍경도 이채로웠다. 손때 붙은 놀이세트를 확대해 놓은 것 같은 앙증맞은 출입구 칸막이 너머에 입국심사원들이 인형처럼 조용히 앉아있었다. 80년대 콘크리트 건물을 반들반들하게 관리한 공항건물 곳곳에 일본인 특유의 근면함이 배어있었고, 가족여행객들로 소란한 가운데에서도 공항직원들은 하나같이 공손했다. 그들의 청결과 친절이 들뜬 이방인들을 급속도로 동화시키는 제법 아름다운 모습에 질투와 의심이 용솟음쳤다. 좋은 것을 보고도 마냥 좋아하지 못하는 일본여행의 딜레마에 빠진 채 심사를 기다렸다.
이런 내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건물 입국심사 직원이 내 여권 맨 앞에 붙어 있는 아랍어로 된 알제리 비자를 보고는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젊은 청년심사원은 애써 냉정하게 직업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처음 보는 비자에 대한 신기함과 당황스러움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미국에서도 문제 삼지 않았던 알제리 비자를 여기서 문제 삼을 줄이야. ‘그래, 니가 울고 싶은 놈 뺨을 때리는구나.’ 나는 의식적으로 당당하고 강하게 응대해 주었고, 직원은 보고여부를 망설이는 듯 잠시 뜸을 들이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도장을 찍었다.
항공모함 같은 비행장과 모형 놀이세트 같은 공항. 청결과 친절... 잠깐의 태클이 있었지만 별 기대 없이 떠나 맞닥뜨린 오키나와의 첫인상은 매우 흥미로웠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만큼만 있었고,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기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연민으로 바뀐 것은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를 알고 나서의 일, 도착 당시 내 안에서는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일본이 아무리 미워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날 공항에서 지켜본 바로 그것은 배운다고 배워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들만의 습성이자 생존방식으로 느껴질 만큼 자연스러웠기 때문.
과연 바깥은 어떨까? 궁금한 마음을 안고 공항을 나섰다.
오키나와의 공기는 한국 못지않게 덥고 습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