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Chu Jul 16. 2018

제주도 전망과 술맛 최고의 편의점

고맙다 여행 - 제주도 편

그 동안의 여행을 거슬러 올라가며 돌아보고 있다. 올해는 유난히 여행이 잦다. 2월 제주도, 3,4월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이번 주 말에 오키나와 예정... 연내 또 어떤 여행이 잡힐지 알 수 없다. 돈복은 없어도 여행복은 확실히 많은 듯. 

2018년 2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다. 올해의 문제는 여행 때마다 눈비를 몰고 다니고 있다는 것. 3월 L.A 도착 하던 날 일 년에 몇 번 안 온다는 비가 주룩주룩, 4월의 캐나다에서는 비바람과 눈보라가 쌩쌩, 그에 앞서 2월의 제주도에서는 한라산이 입산 금지 될 정도의 폭설을 만났다. 요즘에는 밖에 나가기만 하면 비가 와 ‘우신’이라 불린다. 태풍이 그토록 살벌하다는 오키오키 오키나와야, 너 괜찮겠니? 

동행자들의 행운이 나의 불운보다 강력하길...


이날 저녁 다시 시작된 눈보라로 한라산은 입산금지 되었다.


술이라는 거대한 골짜기  

  

제주도에는 대학 후배 김군이 8년 째 살고 있다. 서울생활에 지친 그는 잠시 쉬고 오겠다며 서울을 떠나 지인이 있는 제주도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영국인 여자 친구를 만나 긴 연애 끝에 결혼을 하고 자리를 잡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여행으로 인생이 가장 크게 바뀐 사람.  


가족여행 4박5일의 일정 중 첫 이틀 숙소를 김군 집 근처에 잡았다. 숙소는 최근 중국인이 오픈한 호텔식 모텔이었다. 시설은 나쁘지 않았으나 세정제 냄새가 강하고, 방이 답답한 것이 흠이었다. 우리도 한 때는 락스 냄새 좀 나줘야 청결하다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엔 중국인들이 그런 모양이었다. 가까이 있는 김군의 집은 바다가 보이는 단층집이라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놀러 오시라, 그래 놀러가마 하며 인사를 주고받은 지 8년 만에 간 후배의 집. 잦은 손님치레에 귀찮을 법도 하건만 이틀 내내 모든 면에서 과분한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과분’한 환대 중 하나는 술이었다.   

  

스티븐 킹은 ‘잠을 잘 자는 사람과 잠을 못 이루는 사람 사이에는 거대한 골짜기가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때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개인의 취향과 고충을 인정해주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을 때 자주 떠올리는 문장이다. 내게는 술이 그렇다. 술을 마시면 힘이 나는 사람과 술을 마시면 무력해지는 사람 사이에도 거대한 골짜기가 있다. 후배는 백이십퍼 전자, 나는 백퍼 후자에 속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후배는 술이 참 세기도 하고, 많이도 먹는다. 조금 과장하자면 일상은 술자리를 위한 인트로에 불과하고, 술잔이 앞에 놓이는 그 순간에서야 그날 하루가 시작된다고나 할까. 반면 나의 경우 술을 취할 정도로 마시지도 못할뿐더러 자리가 길어지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지쳐버리는 타입이다. 술에 취해 복잡하고 긴 얘기를 반복하는 자리야말로 견디기 힘든 치명적인 자리이이다. 양으로 따지면 나는 소주 반병에 두 시간 정도가 한계이고, 후배는 최소 소주 세 병에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다.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냈지만 가까워질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은 각자가 줄곧 다른 계곡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군과 가까워진 것은 내가 결혼할 무렵부터이다. 술을 좀 하는 아내가 자리를 함께한 덕이 가장 크고, 나도 술자리에서 길게 버티는 법을 조금씩 터득하게 되면서부터 그와 서서히 친밀해졌다. 그와의 술자리에 적응하는데 10년이 걸린 것이다. 때마침 그 무렵 특별한 만남도 있었다. 15년 전 쯤 김군과 나는 각자 중국에 장기간 머물 일이 있었는데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상하이에서 만나 하루를 같이 보냈다. 우리는 와이탄 구경을 하고, 제법 오붓하게 한 잔을 했다. 북경에서 상하이로 넘어와 한 달 넘게 지내고 있던 나와 북경에 장기간 머물다 귀국을 앞두고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있던 그는 각자 보고 느낀 중국에 대해 그야말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감회를 쏟아내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15년 간 그와의 술자리는 계속 되고 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와 나의 거리는 술이라는 거대한 골짜기 때문이었다기보다 내가 술꾼들에게 둘러친 거대한 벽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술이 약한 것은 인정하기도 싫고, 졸음을 참으며 앉아 있기도 싫었던 내게 술자리는 언제나 전쟁터처럼 힘들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의 김군과의 만남은 내게 그 거대한 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장면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여전히 계곡물만큼 주량차이가 있지만 덕분에 이제는 그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여행에서 아내를 만난 김군보다야 덜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여행이 내게 준 것이 너무나 많다.      

김군의 집이 있는 동네 전경

제주도 최고 전망 편의점  


그런 각별한 마음을 품고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향했다. 역시나 도착한 그날부터 술을 마셨다. 숙소에 짐을 풀고 김군의 집으로 내려가보니 그는 분주하게 저녁상을 보고 있었다. 음식이라고는 안주 밖에 모르던 김군에게 저녁상을 받게 될 줄이야. 삼겹살이야 그렇다 쳐도 그가 손수 담갔다는 김치로 끓인 김치찌개의 맛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영국인 아내를 배려해 젓갈을 넣지 않은 김치를 담게 되었다는데, 사랑으로 발효된 훌륭한 맛이었다. 첫날부터 고기와 밥, 찌개, 그리고 라면으로 이어달리며 술을 마셨다.   

  

다음날, 김군과 영국인 아내, 클레어가 우리를 데리고 애월 일대를 안내했다. ‘효리네 민박’ 때문에 유명해진 동네 곳곳이 젊고 어린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는 해물짬뽕도 먹고, 대기 순번을 받아 기다려가며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방송에 자주 나왔다는 해안 길을 산책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속으로 이 정도면 괜찮았던 오후라고, 어제 숙취도 있으니 이제 들어가서 좀 쉬고 내일의 여행을 준비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후배가 기습적으로 제주도에서 제일 술 먹기 좋은 편의점이 있으니 들렀다가자고 했다. 짬뽕을 먹으며 이미 반주를 한 잔 했건만, 저녁도 먹기 전에 또 술을 마시자니... 알코올이 흥건한 깊은 수렁에 발을 디딘 것 같아 아차 싶었지만... 섬에 들어온 이상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편의점은 해안도로 옆에 있었다. 편의점이라고는 하지만 오래전부터 동네 어귀에 있던 슈퍼 느낌이 물씬 나는 곳. 아니나 다를까. 수십 년 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게라고 했다. 편의점 매장 옆에 바다가 잘 보이는 샷시로 만든 휴게실이 있었다. 휴게실 가운데에 연탄난로가 있고, 분식집 테이블들이 놓인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 전망이 좋은 곳이면 하나같이 비싼 식당이 되어버린 요즘, 편의점에서 산 라면이나 음료, 커피, 술을 바다를 바라보며 편안히 먹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또 휴게실 옆문으로 나가면 벤치가 있어 시원하게 바다를 보며 술을 마실 수도 있었다. 그곳은 현지주민들의 아늑한 휴식처이자 술꾼들을 위한 옹달샘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간식거리를 샀다. 나는 콜라, 김군은 제주도 막걸리 두 병. 그는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예전에 이 근처에 살았는데, 제주도에 내려와 가장 힘들었던 일 년을 이 가게에서 보냈다고 했다. 무엇이 힘들고, 술을 마시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 시절 후배를 품어 준 이 가게와 풍경이 고마울 뿐이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저절로 막걸리 잔에 손이 갔다. 달지 않고 텁텁 시원한 막걸리가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에서 찡하게 퍼졌다. 진짜 술맛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입맛을 다시며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고, 내 안의 거대한 벽이 또 한 번 와르르 무너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몬트리올 미술관의 브뢰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