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저항자 '압델 카데르'

알제리에서의 열흘 5

by WonChu

알제 센트로를 떠나기 전에 기마상의 주인공인 압델 카데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독립전쟁의 영웅인 압델 카데르가 곧 알제리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먼 고대시대부터 알제리는 이렇다 할 독립왕조가 없이 지방의 귀족이나 군벌들이 산재해 있는 황량한 변방에 불과했다. 이곳의 백인 원주민 ‘베르베르족’의 이름은 고대유럽에서 야만인을 부르는 ‘바르바로이’를 떠올리게 하고, 또 16, 17세기에는 ‘바르바리’라는 해적의 본거지로 유명하기도 했다.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가 군복무 시절 해적의 포로로 잡혀 노예생활을 한 곳이 바로 이곳 알제이다. 이렇듯 알제리의 역사는 주변의 모로코나 튀니지에 비해서 민족적 자긍심을 느낄 만한 계기가 없었고, 정체성도 모호했던 것이 사실. 이런 까닭에 최초로 출현한 민족영웅 압델 카데르의 존재감은 가히 절대적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에서 프랑스의 침공에 맞서 싸운 최후의 저항자였으며, 전쟁 중에 알제리 최초의 근대이슬람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한 뛰어난 정치가로, 알제리 민족과 국가의 시조로 평가 받고 있다.


압델 카데르의 전쟁과 민족정신


1830년 프랑스의 침공 당시, 알제리는 160여 년째 터키의 직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말이 좋아 직접통치지 이것은 지역 전체를 관리할 자치정부가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터키의 데이(황제)는 대규모 프랑스군의 침공을 받자마자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고 알제리를 포기한다. 그리고 바로 이때 압델 카데르가 등장한다. 모로코 접경 지방귀족 가문의 자제였던 압델 카데르는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군에 대항한 무력항쟁을 시작했으며, 2년 뒤인 1932년, 24살에 알제리군의 에미르(사령관)에 임명되어 독립전쟁의 선봉에 선다. 서부전선에서 전투를 시작한 그는 국내외의 프랑스에 반감을 가진 세력들로부터 지지와 원조를 받아가며 전투범위를 넓혀 나갔다.


프랑스군은 광활한 국토를 옮겨 다니며 게릴라전을 벌이는 압델 카데르의 전쟁방식에 당황했다. 그 동안 프랑스군이 유럽에서 벌였던 전쟁은 성이나 성당과 같이 지역의 중심지를 점령하면 승리를 선언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알제리에서의 전투는 그렇지가 않았다. 알제리군은 군본부 자체를 신속하게 옮겨다니며 전쟁을 벌였으므로 그들이 생각하는 승패개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군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후퇴했던 알제리군은 상대가 이미 점령했다고 생각하는 다른 지역을 공격해서 그곳을 점령했다. 이런 식으로 승패 없이 프랑스군의 전사자는 늘어갔고, 병사들은 서서히 지쳐갔다. 결국 프랑스는 1936년 휴전협상을 시작하여 다음해에 알제리-프랑스 간 타프나 협정을 맺는다. '압델 카데르'와 프랑스의 장군 '뷔조'는 이 휴전협정의 당사자였고, 휴전은 사실상 압델 카데르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 협정으로 압델 카데르는 프랑스인이 많이 살고 있는 대도시들(알제, 오랑, 콘스탄틴)을 제외한 알제리 땅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권위를 인정받았다. 서부지역은 물론 동부의 카빌리, 사하라의 오아시스, 동사하라의 관문 비스크라까지가 그가 지켜낸 영역이었다. 압델 카데르는 전형적인 이슬람 귀족교육을 받았고, 스무 살 무렵 2년간 아버지와 성지순례를 떠났다. 알제리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향하는 성지순례길은 종교적 의무인 동시에 견문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 청년 압델 카데르는 이웃나라들을 직접 살펴보며 하루 빨리 제대로 된 근대국가를 건설해야만 유럽열강으로부터 민족의 자주성을 지킬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이러한 신념에 따라 휴전 직후부터 국내외의 전폭적인 지지와 존경 속에 최초의 알제리 민족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군대조직을 정비해 알제와 콘스탄틴 사이 프랑스군의 운송로를 차단하는 한편 율법에 따라 조세를 정하고 부족 간의 차별을 폐지하는 등 국가체계를 갖추기 위해 매진했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를 채 완성하기도 전에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휴전협정 5년 뒤인 1942년, 프랑스의 뷔조 장군이 다시 알제리 총독으로 돌아오면서 전면적으로 전쟁을 재개했던 것이다. 과거 게릴라전에 호되게 당한 뷔조가 이번에 들고 나온 전법은 '초토화 작전'이었다. 그는 작은 마을들이 또 다시 알제군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죽이고, 주거지를 불태웠다. 알제리 인구가 300만에서 200만으로 줄었을 정도로 참혹한 학살이었다. 수세에 몰리게 된 압델 카데르는 모로코로 피신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모로코 왕국은 그의 군대를 받아들이는 한편 프랑스군에 저항해 함께 싸웠다. 하지만 알제리의 지방부족들이 모두 프랑스에 항복하고, 압델 카데르의 부하들은 물론 동생들까지 전사하거나 투항하는 한편, 모로코 왕국의 군대마저 프랑스군에 격퇴 당하면서 저항의 불씨는 완전히 꺼져 버린다. 프랑스의 화력에 맞서 장장 17년 동안 벌인 북아프리카 최후의 저항은 이렇게 끝났고, 1947년 12월 압델 카데르는 알제의 가자우에 모스크에서 칼을 내려놓는 항복식을 거행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전쟁영웅이 투옥과 함께 생을 마감한 것과는 달리 압델 카데르는 오랜 시간 타향에서 삶을 이어갔다. 항복 후, 압델 카데르는 세 명의 부인과 자식들, 90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프랑스 남부의 소도시 '포'에 수감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인들에게 이슬람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가 했던 강연은 <프랑스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으로 남아있다. 1855년 오십이 넘은 압델 카데르는 알제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석방되었다. 이후 시리아의 다마스로 가서 그곳에 사는 1만 5천의 알제리인과 튀니지인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다 1883년 운명했다.


독립 이후의 알제리


압델 카데르가 세상을 떠나고 80년 후, 알제리는 1962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함으로서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한다. 알제리 정부는 그의 유해를 시리아 다마스에서 알제의 엘알리아 묘지로 옮겨 오는 한편, 알제리를 초토화시켰던 뷔조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고 바로 그 자리에 압델 카데르의 기마상을 세웠다. 압델 카데르가 110년 만에 다시 뷔조장군에게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알제리는 독립 후 사회주의에서 강경이슬람 정권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기를 보냈다. 독립 직후 알제리에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오일쇼크가 있었던 1980년대까지 알제리는 호황을 누렸다. 고유가 덕분에 정부는 모든 사회불만을 돈으로 보상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재정이 넉넉했다. 하지만 1980년 말에 접어들면서 유가하락에 따른 대량실업, 경제파탄, 장기집권을 해 온 사회주의 정부의 부패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총선을 통해 강경이슬람이 다수당으로 부상했다. 사회주의 정부는 권력을 넘겨주지 않으려 버텼고, 비타협적인 두 세력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결과 1991년부터 10년간 내전이 벌어졌고,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알제리는 국제사회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내전은 1999년 실용주의 정부가 들어서며 종식되었는데, 양 세력을 회유, 통합한 사람이 독립운동가 출신인 '부테플리카' 현 대통령이다.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이 독립운동가 출신이었고, 현재 네 번째 임기를 수행하고 있는 부테플리카 대통령도 독립운동의 주역 FLN(자유해방전선)의 외무부 장관 출신이다. 만일 그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면 강경이슬람 세력을 설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제리에서 '독립운동'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정치적 덕목이자 유일한 통합논리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알제리 민족의 정체성과 미래


우리는 압델 카데르라는 인물을 통해서 알제리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그는 전통 이슬람 교육을 받았고, 근대 이슬람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으며, 최후까지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고, 죽는 그날까지 유럽에 이슬람을 전파하고자 했다. 독립과 이슬람. 이것이 알제리 정체성의 핵심이고, 그 시작에 압델 카데르가 있다. 제도와 권력주체가 아무리 바뀌어도 독립과 이슬람은 그들의 민족정신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1999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한국나이로 80세. 알제리 사람 대부분이 내란을 수습하고 사회를 안정시킨 그의 업적을 칭송한다. 하지만 고령으로 인해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한다. 해변의 작은 식당에서 일하는 알제리청년 아유브는 우리에게 말했다.

“알제리 사람은 강한데 대통령이 너무 늙었다.”


이제 겨우 사회 안정을 이룬 알제리는 새로운 시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20년 만에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 독립운동 세대 이후의 새로운 통합논리와 비전을 준비해야할 시점인 것이다. 더 개방적이고 활기찬 사회를 원하는 청년들조차 금욕적이고 봉건적인 이슬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것이 알제리의 현실이다. 욕구불만이 강한 청년 아유브도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틈만나면 이슬람이 지구에서 가장 훌륭한 종교라고 몇 번씩 강조할 정도.


압델 카데르의 후예,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자존심 강한 이슬람 국가, 신앙과 자유를 독립정신으로 묶어 온 알제리. 민족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순간이 될 그들의 다음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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