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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May 15. 2019

천천히, 멈추지만 말고

평화누리길 3코스 - 한강 철책길

‘애기봉 입구’에서 ‘전류리 포구’까지의 평화누리길 3코스는 김포지역 누리길의 가장 긴 구간이자 마지막 코스이다. 공식 거리는 17km. 소요시간 4시간 30분. 하지만 도보여행 특성상 대충교통편에서 시작점이나 종착지까지의 거리가 있으므로 항상 3km, 4km  추가되는 것은 기본, 거기에 나처럼 구석구석 어슬렁거리기 좋아하면 1시간 추가, 그리고 종착지에서 버스 편을 고수하며 오기를 부리면 또 한 시간 추가...    

 

결국 여름의 선제공격에 무방비로 노출 된 채 7시간을 걸었다.  

          

평화의 공기


3코스는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만한 길이었다. 17km 중 마을과 마을을 잇는 산간도로가 반이고, 끝없는 한강 철책길이 나머지 반이었다.    

 

야트막한 야산들 사이, 북녘 땅이 바로 건너보이는 논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농부들은 들판 너머 애기봉과 개풍군이 마주보고 있는 이곳에 매일같이 나와 농사를 지어왔을 것이었다. 오랜 세월 나라와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긴 채 묵묵히 논에 고개를 파묻고 살아왔을 그들. 


지나온 세월에 대한 짠한 마음을 담아 간단한 인사를 드렸더니, 여유롭기 그지없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들의 표정에서 평화와 행복의 기운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 행복은 아주 작은 충돌로도 순식간에 공포로 뒤바뀔 수 있을 것이었다.   

        

마근리 마을. 들판 너머 왼쪽 봉우리가 애기봉이고 오른쪽 낮은 능선이 북한의 개풍군.

언제 있을지 모르는 난리에 대비한 듯, 집들은 하나같이 산을 등진 채 남쪽을 향해 앉아 있고, 적대감이 만든 텅 빈 하늘에서는 새들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조잘댔다. 가축들은 외지인이 반가운지 소, 개, 고양이 모두 오래도록 눈을 맞추는 이곳. 벌써부터 치고 들어 온 외지인들이 파헤쳐 놓은 전원주택 부지도 평화의 징조로 봐주기로 했다.     


천천히, 멈추지만 말고, 끝까지    


3코스의 절정은 뭐니뭐니 해도 끝없는 철책 길이었다. 고구려 청년과 백제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오는 연화산을 넘자 드디어 김포평야 너머 한강철책길이 나왔다. 오직 철책과 시멘트 포장길만 있는 장장 8km의 길, 처음부터 끝까지 좌로는 철책과 한강이요 우로는 김포평야였다.   


오랜만에 만난 철책. 이때까지만해도 이 길이 얼마나 먼길인지 몰랐다.


1코스 이후로 오랜만에 만나는 철책길이 반가웠다. 누군가에겐 삭막하기만 하고, 누군가에겐 광막한 아름다움이 느껴질 그런 길이었지만, 어쨌거나 우리나라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풍경임에는 틀림없으므로 누구나 한 번 걸어볼 만한 곳인 것은 틀림없었다.


강 건너는 어느새 파주와 자유로. 한강이 남과 북 사이로 흘러들어와 드넓은 논을 채는 모습에 계절의 풍요가 가득 차올랐다. 철책 너머 한강 변 습지에 노란 부리를 가진 재두루미들이 날아다니고, 철책 아래에는 동그란 민들레꽃과 홀씨로 빼곡했다. 그리고 나비들이 이어달리기를 하며 마치 안내하듯 발끝을 맴돌았다. 철책만 없었다면 더없이 살기 좋은 곳. 일촉즉발의 긴장감에도 불구 농부들이 이곳을 떠나지 못한 이유를 알고 남을 풍경이었다.     



반가움과 풍요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길을 걷는 사람 오늘은 나 혼자인 듯, 간간히 차들과 자전거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이른 여름의 습격 속에 걷고 또 걸었다.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철책의 끝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고, 찰랑대던 마음은 당혹감으로 말라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겹게 길 끝에 도달해보면 철책은 한 구비를 돌아 또 다시 끝모르고 길게 뻗어 있었다. 


1,2구간만 생각하고 절반쯤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물을 다 마셔버렸는데, 지나고보니 그곳은 반의 반 지점. 엇나간 예상과 기대로 전에 없었던 갈증과 초조함에 휩싸였고, 그럴수록 길은 더 멀게만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혼자 왔다갔다하며 이런 사진을... 직업병인 듯.

     

평화로 가는 길도 이와 같을 것이었다. 언뜻 금방 닿을 듯 보이지만 막상 가보면 멀게만 느껴지고, 한 고비를 넘기면 또 다시 다음 관문이 아지랑이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그런 과정의 반복. 평화로 가는 지난한 과정을 온몸으로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이 길 위에 표지판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천천히'


표지판을 그토록 오래 바라본 적이 있을까. 

나는 그 앞을 한참 서성이며 길이 전하는 계시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천천히, 멈추지만 말고, 끝까지 가자.’  


      


그렇게 김포구간을 완주했다. 1구간의 손돌묘, 2구간의 문수산 전망이 생각지 못한 감동이었다면, 3구간의 철책길은 허를 찌르는 반전이었다 할 수 있다. 따로 조성한 볼거리보다 구간마다 각기 다른 자연적인 매력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김포구간의 미덕이었다.


언젠가 문수산 너머의 군사구역이 활짝 열려, 강령포, 조강포, 마근포로 이어지는 북녘과 가장 가까운 새로운 철책길 구간을 걷게 되기를, 그 전에라도 평화수역이 된 조강에서 배를 타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평화누리길 김포구간 후기를 마친다.

 

김포구간의 이야기 하나와 두 개의 건의사항    


김포를 떠나기 전에 이야기 하나. 이곳의 철책을 지키는 부대는 해병대 제 2사단, 일명 ‘청룡부대’이다. 1965년 해병대는 월남파병을 위해 김포지역의 병력을 주축으로 ‘청룡여단’라는 제2여단을 창설했고, 그 제2여단이 월남에서 귀환한 후 김포·강화 지역의 경계방어를 맡으며 사단으로 개편되었다고 한다.


당시 맹호부태와 함께 최초로 파병된 청룡부대는 1967년 베트남 중부의 '꽝나이'에서 40여 명의 중대원으로 2400여 명의 베트콩 연대 병력을 물리치고 진지를 지켜낸 '짜빈동 전투'의 주역이었다. 이 전투를 보고 한국군의 전투력에 놀란 미군들은 물자와 무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했고, 북베트남군에서는 '100%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는 싸우리지 말라'고 지시 했을 정도였다 전해진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내릴 때 나는 혼란스럽고 주저하는 마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꺼림칙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청룡 여단 해병대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전쟁 당시 북베트남 군대는 그들을 일컬어 박정희 군대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한국군을 미군이나 남베트남군보다 훨씬 두려운 적군이라 생각했습니다.”


-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 한국어 판 서문 중    



하지만 청룡여단은 민간인 70명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운 ‘퐁니 퐁넛 마을 학살사건’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고도 하는데, 우리군은 당시는 물론 2013년에도 공식적으로 학살사건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현재 베트남 정부가 굳이 과거사를 거론하지 않고 있기에 우리 정부 또한 새로 공식입장을 표명할 일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누리길을 걷는 동안 팍팍한 일상을 견디는 다양한 표정의 해병대원들을 보았다. 월남전의 혁혁한 전과와 현재 그들의 노고에도 불구 굳이 지난 학살의 기억을 골라 들춰내는 이유는, 이 길에서 우리가 봐야할 것은 결국 반공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극소수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위기의 권력에겐 내부갈등을 잠재우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기도 했다. 길고 길게만 느껴지는 이 철책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계 중 한 점에 불과할 터, 우리가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대상은 철책 너머의 적군이 아니라 철책 사이에 흐르는 적대감이지 않을까.  


깃털 옆에는 철책에 감전당한 듯 보이는 새의 사체가 있었다. 새들조차 때로 넘지 못하는 한강의 철책.

 

우리의 적군이었던 ‘바오 닌’은 이렇게 말한다.      


“내 생각에 그 광기 어린 살육 행위의 원인은 서로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이해가 없고 공감이 없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특히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젊은이들이 정치권력에 속아서 서로를 적개시하고 살육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 한국어 판 서문 중 

   

이해와 공존을 먼저 이야기하기까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인내와 고민이 있었을까? 우리의 잔혹했던 전쟁들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하물며 같은 민족인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하고 있는가? 

누리길에서 만난 질문과 고민해야 할 과제가 너무도 많다.     

        

두 개의 건의 사항    


건의 사항 1.  


3코스를 완주하는 지점은 ‘전류리 포구’이다. 김포지역 포구 중 유일하게 민간에게 개방된 곳으로, 보안과 어장관리를 위해 허가를 받은 27척의 어선만 조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바다와 한강이 만나는 드넓은 강폭으로 또 다른 느낌의 한강과 서울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전류리 포구. 바다와 같은 한강. 가까운 산은 파주 오두산, 멀고 희미하게 보이는 개풍군.

 

이곳의 아쉬운 점은 평화누리길 김포구간의 종착지임을 알리는 표식이 없다는 점이다. 하다못해 ‘수고하셨습니다.’라든가 ‘김포구간 완주를 축하합니다.’ 같은 인사가 없으니 끝이 밍숭맹숭했다. 가장 고단한 구간을 걷고 난 여행자에게 자축의 의미로 기념사진이라도 찍을 만한 표식 하나쯤 있아야 할 것 같고, 다음 4구간(고양 행주나루길)에 대한 예고나 남은 누리길의 무사완주 응원 정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한다.  


평화누리길 시작구간이라는 의미도 크고, 그 동안 김포를 오가며 나름 정도 들었는데, 막상 잘 가라는 인사 한마디 못 듣고 그곳을 떠나오자니 마음이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평화누리길 개요 푯말 하나 뿐인 김포구간 종착지. 인사도 없이 김포와 헤어지는 기분이었다. 

건의사항 2.       


또 하나는 누리길 특성상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각 구간의 끝에 대중교통 편이 드물고, 안내판도 없다는 점이다. 일례로 2, 3구간이 끝나는 지점의 마을버스는 ‘따복 7번’이었는데, 정류장이 누리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거니와 배차간격이 너무나 길다.     


특히 3구간을 마치고 나서가 절정이었다. 어렵게 찾아간 마을버스 정류장에는 배차 시간표가 없었다. 인근 가게 사장님에 여쭤보니 "4시 10분차는 지났고, 다음은 7시 반 차예요. 저쪽으로 걸어가면 다른 버스정류장 있는데, 힘드시면 콜택시라도 불러드릴까요?"  콜택시를 거부하고 오기를 부려 걸어간게 실수였다. 이렇게 저렇게 완주를 끝내고도 1시간이나 더 걸어 어렵게 만난 마을버스 기사님 왈 “전류리에서요? 거긴 깡촌이라 내 차 없으면 못 다니는 데여요.”   

  

혹시 3구간 가실 분들은 종착지이 전류리에서 여러 고민 말고 꼭 콜택시로 이동하실 것을 권하는 바이며, 경기도 혹은 김포시에는 마을버스 정류장에 배차시간표라도 붙여놔 주시길, 각 구간 끝에 가까운 대중교통 이용가능 지점을 알리는 표지판 정도 만들어주시길 건의하고 싶다.    


당일 코스는 일출과 석양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단점. 멀고 먼 버스정류장 덕분에 해질녘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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