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누리길 4코스 - 행주산성 길
평화누리길 4코스는 행주산성에서 일산 호수공원까지 4시간가량 걷는다. 마포구에 서식하는 나로서는 시작점과 끝점 모두 이보다 교통이 편한 곳이 없다. 버스에 올라타니 반가운 뉴스가 나온다. 김정은 위원장이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 트럼프의 친서를 받았으며, 심중히 검토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쾌청하다.
누리길 어귀의 어지러운 식당가 풍경도 이젠 제법 익숙하다. 입구 기념품 매장 주차장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나와 있다. 행주산성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왜구의 후예들이라니... 하는 생각을 하며 행주산성으로 올라간다. 평화누리길 4코스 입구는 주차장에 있다. 누리길로 들어가기 전 행주산성을 둘러보기로 한다. 평화누리길 안에 행주산성을 둘러보는 순환코스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4코스 가시는 분들께 누리길로 들어가 둘러보시는 것을 권한다. 코스 시작 전이라 서두르다보면 ‘행주산성 둘레길’을 다 못보고 빠져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행주대첩 기념탑 위에 서니 그동안 걸어온 김포는 물론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오늘 길을 나선 것은 순전히 이 전망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런 날씨를 놓칠 수 없었다. 나중에 자전거를 타고 해질녘 풍경을 보러 와도 좋을 듯. 오늘부터 행주산성을 보양과 불륜의 온상이 아닌 서울 북단 최고의 전망대로 기억하기로 한다. 높지 않은 덕양산 위에 이런 전망이 있을 줄이야.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이 서울 탈환을 위해 왜 여기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 것 같다.
산성을 돌아보고 급히 서둘러 평화누리길로 들어간다. 역시 서울과 가까워서인지 한강변에 역사공원이 말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자연 그대로의 한강변을 마주할 수 있는 흔치 않은 풍경. 강 건너가 강서구 개화산이고, 저 멀리 속은 산은 인천 계양산이다. 가뭄때문에 물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으므로 손은 담그지 않기로 한다.
공원을 빠져나와 행주대교를 향해 걷는다. 길 옆 작은 밭에 막 캐낸 감자를 사가라고 담아 놓았다. 어제가 하지. 시골농장의 농사로 소일하시는 아버지도 어제 감자를 캐신다고 했는데... 아들인 나는 제 멋에 취해 엉뚱한 곳에서 아무도 몰라주는 땀을 흘리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 생에 아버지는 감자를 캐는 배역을 맡았고, 나에게는 그것을 감사히 맛있게 받아먹는 배역이 주어졌다. 그러니 배역에 충실할 수밖에.
보양식을 주 메뉴로 하는 식당 뒤편 자연스럽게 방치된 강변길을 지나면 행주대교가 나온다. 대교 아래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나루터가 있다. 여전히 고기를 잡는 배들이 있는지, 어구와 어부들이 간이시설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다. 잘만 꾸미면 활어와 한강체험의 명소가 될 법한 곳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행주대교 아래에서 무작정 강을 따라 걸어 나오는 바람에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4코스의 정규코스는 자유로의 건너편을 따라 일산으로 향하는 아기자기한 길. 잘못 들어선 길은 한강과 수풀과 고수부지의 밭 사이로 난 다소 황량한 길이다. 누리길 리본이 사라진 길을 한참 걷다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 자유로 옆으로 난 자전거누리길로 올라탔다. 그 덕분에 정해진 코스에 없는 긴 철책길을 걷는다. 얼마 전까지 경계가 삼엄하던 초소는 비어있고, 철책은 상단의 철망이 제거되어 있다. 평화가 일사불란하게 오고 있다. 유적이 된 초소와 철책, 색다른 각도에서 보는 자유로 풍경으로 땡볕 길에서의 고난을 보상받는다.
일산 초입에서 도보길과 자전거길이 만나도록 되어있어 다행이 제 길로 들어섰다. 언젠가, 아니 벌써 금싸라기
땅이 되어 있을 비닐하우스와 밭들을 지난다. 차창 너머 숨어 있던 풍경들 속을 걷고 또 걷는 길이다. 그러다 도시는 갑자기 나타난다. 황량한 길을 거쳐 오다보니 마치 외계에서 온 비행체처럼 툭 튀어나온 육교의 모습이 느닷없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통일도 이렇게 느닷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겠지... 하는 지극히 상투적인 비유를 떠올리며 도시의 산책로로 들어선다.
처음으로 일산 호수공원의 호수를 직접 본다. 날씨가 쾌청하여 호수도 더 넓어 보인다. 평화누리길은 호수공원 내 선인장전시관부터 5코스가 시작되어 파주로 향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4코스와 5코스를 한 번에 도는 것을 예정하고 나선 길이건만, 도심의 산책길인 줄만 알고 점심을 미리 싸오지 않은 것이다. 밥을 먹으려면 공원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걷기로 한다. 이래저래 5시간을 걸었다. 밥을 먹고 버스를 타러 일산 시내로 나오니 이제야 내가 걸어 온 길의 향방을 확실히 알겠다. 오늘로서 이제 일산을 오가는 차창 밖 숨은 풍경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자주 오갔던 길을 다른 각도에서 접하는 재미야말로 평화누리길 4코스의 가장 큰 매력이자 소득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의 전쟁, 임진왜란과 행주대첩
행주산성은 평화누리길에 만나는 또 다른 전쟁의 역사이다. 김포구간에서 고려시대 몽골과의 전쟁유적인 ‘손돌묘’, 한국전쟁 개전 초기 ‘김포반도 전투’와 해병 제 2사단의 ‘베트남전’을 만난데 이어 4코스에서 ‘임진왜란’을 만난다. 관심을 갖고 보니 전국토가 전쟁의 현장이다.
행주산성 곳곳에 적힌 안내문을 보며 새삼 흥미로운 대목들을 발견했다. 우선 권율장군이라는 캐릭터. 8척 장신이었던 그는 40세가 넘도록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다가 46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고 한다. 관직에 나간 뒤로도 승진과 파직을 반복하며 계속 한직으로 돌았다. 아마도 관료적 상관들과의 잦은 충돌이 있었던 듯. 기골이 장대하고 강직하고 나이까지 많아 평시 관료조직에서는 애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란이 터졌을 때 그의 나이 56세. 왜군이 파죽지세로 올라오자 선조가 급히 권율이 어느 구석에 가 있는지 찾는다. 잦은 충돌에도 불구 능력만큼은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반증. 그는 당시 의주목사로 있었고, 선조는 당장 그를 광주목사로 내려보낸다. 평시에 북방 벽지에 처박아 놓고 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적진의 한가운데로 보낸 것이다. 어명에 따라 두말없이 광주로 달려간 권율은 이번에도 지휘관과의 의견충돌로 고초를 겪으며 패전을 거듭한다. 패전으로 상관들이 하나둘 사라져가는 가운데, 임금은 의주로 피난을 가버리고 한양은 왜군에게 점령되어 전세가 최악에 이른다.
이 무렵 권율은 승병과 합세하여 전라도를 지켜내는 전과를 올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된다. 이제 누구 허락 안 받고 맘대로 싸울 수 있게 된다. 그는 관군과 승병에 더해 의병을 모아가며 후방에서 서울로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광주, 남원, 전주, 금산을 거쳐 수원까지 승전은 계속된다. 서울에서 싸운 그의 군사들이 주로 전라도 관군과 승병과 의병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이다.
권율의 군대가 수원에 진을 칠 무렵, 마침 명나라에서 5만의 원군을 보내 위에서 치고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에 권율은 한양을 탈환하기로 결심, 유격전을 치르며 서울 외곽을 돌아 북상하여 덕양산에 진을 치고 군사를 집결시킨다. 그리고 그 덕양산이 바로 행주산성. 북쪽에서 내려오는 명나라 군대와 협공을 해 서울을 탈환하고자 했던 것이다.
왜군은 덕양산에 조선의 남은 군사들이 집결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다. 명나라 군대가 한양까지 내려오기 전 조선군을 미리 소탕해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왜군은 ‘평양에서 죽음을 면한 자, 황해도에서 탈출한 자, 개성에서 후퇴한 자, 함경도에서 소문을 듣고 도망쳐 온 자‘들을 모두 모아 전열을 정비해 선제공격에 나선다. 왜군의 수는 3만, 행주산성의 조선군은 정예군과 의병, 그리고 행주치마로 돌을 날랐다는 전설의 부녀자를 모두 합쳐 3천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3만 대 3천, 조총 대 창과 돌맹이의 전투는 권율과 그의 군사들은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이로써 전세는 결정적으로 전환된다.
아군이 전멸한 남도에 뒤늦게 투입되어 흩어진 병력을 모아가며 치고 올라온 56세 권율 장군의 의지와 기세가 새삼 놀랍기만 하다. 공원의 동상과 조각도 맘에 든다. 8척 거구를 표현한 그의 동상의 육중한 느낌도 좋고, 그와 함께 한 관군, 승병, 의병, 부녀자의 모습으로 둘러쳐진 부조도 뭉클하다. 다만 무능과 나태함, 사리사욕과 정쟁으로 위기를 만들어놓고 번번이 민중의 힘으로 되찾은 평화 위에 아무런 가책 없이 숟가락을 얹어온 권력자들의 몰염치한 생존법이 개탄스러울 뿐.
그래서 행주대첩 비문 해설의 마지막 대목은 더더욱 뼈아프다.
“공은 46세에 임오년 문과에 합격하여 낭관에서 바로 당상관으로 올라갔으나, 문과출신의 장군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중앙정부에 있었을 때가 적었으며, 어려운 시국을 당하여 정치적으로는 별로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의 과거 부하였던 막료와 사병들이 공의 덕의를 사모하면서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므로 다투어 물자를 내놓아 이 비를 세우기로 하였으니 갸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