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화누리길 철원 1,2 코스 - 금강산길 (2일차)
< 2 일차 >
1코스 / 소이산 - 철원역사문화공원 - 촌뜨기길 - (노동당사) - 도피안사 - 학저수지 - 칠만암 - 대위리검문소
2코스 / 대위리검문소 - 양지리쉼터 - 두루미평화타운
이어걷기
평화누리길을 이어 걸을 때 가장 힘들고 번거로운 것은
집에서 출발지와 종착지까지 오가는 것이다
남들은 일생에 한 두 번
군인 면회나 가는 전방동네
대중교통을 몇 번씩 갈아타고 출발지가지 가서
종일 걷고 나서는 종착지 근처 빈 버스정류장에서
하루 몇 대 오지 않는 농촌버스를 잡아타고
빠져나와야 한다
출발지에 도착해 아무도 없는 길에 서면
이제 걷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 한없이 가벼워진다
오가는 번거로움 때문에 걷는 것이 덜 힘들게 느껴지는 것인지
걷는 것이 좋아서 오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것인지
그렇게 딱 내가 걷는 만큼 세상과 하나가 되어 가면서
혼자만의 평화순례를 이어간다
새로운 시도
둘레길 고수들은 꼭두새벽에 시작해 해 지기 전까지
두 코스를 완주하기도 하지만
천천히 볼 거 다 보고 다니는 나같은 여행자는
하루 한 코스 완주하기가 버겁다
예상보다 빨리 해가 지기 시작해
산 하나를 뛰다시피 넘은 적도 있고
아무 준비없이 어둠을 만나
도리 없이 가까운 펜션에 픽업을 요청
혼자 넓은 가족실에서 제 값 다 주고 잔 적도 있다
길에서 잘 수만 있으면
지는 해에 쫓기지 않아도 되고
잠만 자고 나와 본전생각 할 일도 없고
거기에 더해 마음에 드는 곳에 밤새 머물며
온전히 풍경과 하나가 될 수 있을 텐데...
당일치기가 더 어려운 강원도 코스로 넘어가며
그동안 미뤄왔던 백패킹을 시도 했다
행운
이제 온 길이 나의 잠자리요
멈추는 곳이 오늘의 종착지
완주에 대한 부담을 덜자 샛길이 눈에 들어왔다
소이산 362m 표지판
왠지 전망이 좋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
큰 기대 없이 힘 들이지 않고 올라간 낮은 봉우리
올라서자마자 그곳이 내가 머물 곳임을 알았고
운 좋게도 첫 번째 야영에서
내가 바라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쾌청한 하늘과 시원한 바람
사방으로 펼쳐진 철원대평야와 섬처럼 솟은 격전지들
들판을 둘러 싼 비무장지대와 그 너머의 북녘 땅
14시간 동안 한 자리에서 지켜 본
일몰과 수많은 별들과 일출
그곳에서 살아온 원주민들의 기막힌 사연들
그리고 전사한 영혼들과의 동침과 애도까지...
평생 잊지 못할
보석 같은 밤이었다
일출
단잠을 자고나서 정상에 올라 일출을 기다렸다
볼 때마다 압도 당할 수 밖에 없는 광활한 평야
비무장 지대 너머 하늘이 연하게 물든다
비무장지대가 있어 당연히 북쪽으로 여긴 그곳이
내가 가야할 동해바다가 있는 쪽임을 안다
치열한 야간전투 끝에 남은 새벽의 포연처럼
먼 들판 바닥에 고인 안개 위로
점점 더 붉게 타오르는 철원의 빛
낮은 구름이 해를 가린 것인가 할 무렵 안개를 뚫고
옅은 산 위로 불쑥 이글거리는 태양이 선명하게 올라온다
뜬 눈으로 밤을 샌 듯
어제와 같이 맑고 동그란 얼굴
커다란 행운에 감사한 마음 달리 표현할 길 없어
동서남북 사방에 대고 절이라도 올려본다
이 땅에 평화, 이 땅에 평화,
이 땅에 평화, 이 땅에 평화
새로운 시도
계단 아래 야영지로 내려와 짐을 싼다
아직 서툰 짐싸기에 가방이 닫히지 않아 다시 풀고 접는 동안
잊고 있던 갈증과 허기가 몰려온다
커피 물은 커녕 냉수 조차 없고
밤새 사진을 찍느라 핸드폰 전원이 나가서
사진은 물론 가족들에게 생사를 알릴 메시지 한 줄 보낼 수 없다
서둘러 산에서 내려와 다시 누리길에 올라탄다
도움 청할 사람 없나 두리번 거리며 걷다 만난
철원역사문화공원
1930년대 철원의 모습을 재현한 테마파크로
공원 뒤 소이산의 뒤통수엔 모노레일로 스크레치가 나 있다
평소 같았으면 혀를 차며 지나쳤을 유흥지
아무라도 있을까 싶어 들어가 본다
주차장에서 차박을 하고 아침식사를 준비 중인 중년부부 발견
핸드폰 충전을 부탁드리고 기다리는 사이
햇반에 컵라면, 참외와 커피까지 내어주신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온수가 나오는 깨끗한 화장실
뜨거운 물 수건에 적셔 얼굴과 몸을 닦으니
사막의 오아시스가 따로 없다
이제 살만해 진 걸까
갈지자로 파헤쳐진 소이산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주말에는 표를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려온다는 모노레일
지역과 맞지 않는 상업적 컨셉의 테마파크
간사한 한숨 내쉬며 서둘러 그곳을 벗어난다
촌뜨기길
철원역사공원 맞은 편
철원경찰서 복원공사장 옆에 촌뜨기 길 안내도가 있다
월북작가 이태준 선생이 고향 철원을 배경으로 쓴
단편소설 촌뜨기의 실제 장소가 여기인 모양
일제 말 자타공인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이태준 선생
전쟁 전인 1946년 월북하여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다
종파주의자로 몰려 57년 숙청당했다
한 때 선생의 영롱한 문장과 서민적인 감성과 유머에 빠져
몇몇 작품을 탐독한 적이 있으나
너무 오래 전이라 그런지
선생에 대한 흠모의 감정 흐릿하고
촌뜨기라는 작품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돌아와서 촌뜨기를 찾아 읽어 보니
아뿔사... 그날의 모든 걸음이 헛걸음인 것만 같다
일제시대 철원,
가난한 사내 장군이가 아내와 함께 고향을 떠나게 되는
며칠 상관의 짧은 이야기
먹고 살 길 막혀 아내를 친정으로 떠나 보내려는 장군이와
야속한 남편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아내의 이별
투박한 감정, 생생한 표현에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다가 어느 새
팍팍한 세상살이 남 일이 아닌 듯 가슴이 아려오는...
미리, 아니 잠시 앉아 전자책이라도 찾아 읽었다면
철원경찰서, 마을길, 철둑길, 읍내 시장
옛 철원의 모습 선명하게 그려 보았을 것을
그 길들 모두 놓치고 지나치며
먼 길 걸어서 무엇할까
깨달음의 언덕
갈림길에서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철원 평화누리길의 랜드마크이자 필수코스
노동당사를 지나쳤다
촌뜨기에 나오는 철도 둑길도 그쪽
지나가던 군인이 길을 잘못 알려주기도 한 탓도 있고
나중에 만난 양지리 이장님 왈
노동당사 진입로에 공사 중 펜스가 쳐져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웠을 거라고 위로하셨지만
한 번 지나면 돌아갈 수 없는 길이기에
놓치고 온 풍경들이 뼈아프다
그렇게 잘못 들어선 길에서 만난 도피안사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 라는 뜻
사찰은 여러 차례 전소되어 재건하였으나
국보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철조비로자나불상이
사찰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데
대적광전의 문 잠겨 있어 보지 못하고 돌아선다
조금 더 기다려 먼 발치에서라도 보고 올 것을
국토횡단을 목표로 이어걷는 길
한 번 지나치면 되돌아갈 수 없으니
들러야 할 곳 보아야 할 것 앞에서
조급하게 굴지 말자고 다짐한다
길, 길, 길
철원평야에 논물을 대는 학저수지를 지나
뱀산과 개구리산을 돌아
학마을 고개를 넘어
다시 철원평야길을 건너
드디어 한탕강을 만난다
칠만암 강물에 발을 담그고 쉴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걸어왔건만
계곡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누군가 바닥에 써놓은 응원글에 힘을 내 산을 넘는다
양지리 쉼터에서의 달콤한 휴식을 기약하며
몇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참아낸다
산을 넘으면 들판과 한탄강을 양옆으로 끼고 걷는 길
한탄강의 풍경 우거진 나무에 가려 있다
이곳은 겨울에 와야 제대로된 풍경을 보겠구나 하며
양지리 쉼터에 도착하니...
그늘 한 점 없는 황량한 공터에 의자 몇 개 놓여 있다
쉬어야 할까?
쉬아야 한다.
여기에 쉼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길도 온 길만큼이나 길 것이 틀립 없으므로
쉼터에서 본 철원 한여울길 1코스 지도
저 아래 신철원 순담계곡, 고석정에서 한탄강을 따라 이곳까지 걸어 올라오는 길
아무래도 철원은 겨울풍경이 제 맛일 것 같은 예감
올 겨울 한여울길을 걸어보자 마음 먹는다
한여울 길을 걷고 나서
겨울의 소이산을 보고 놓쳐버린 노동당사와 촌뜨기길을 걸어보리라...
한탄강과 숨바꼭질을 하며 한참을 걸어
큰 길을 만난다
노동당사에서 바로 이어지는 너른 도로를 따라가다
DMZ두루미평화타운 이정표를 만난다
간판이 많은 것으로 보아
철새보단 못하지만 사람 쉴 곳도 있을 것만 같아 안길로 들어가 본다
국제두루미센터와 양지리 이장님
이름만 들어서는 칠만암, 양지리 쉼터보다 못할 것 같은
사람이 아닌 철새나 쉬어갈 것 같은 두루미평화타운
들어와보니 삐까번쩍한 국제두루미센터 건물이 서 있다
철새에 관한 전시는 물론
민통선 관광 자가용 신고를 내주는 곳이라
사람도 많고 시설도 훌륭하다
에어컨 바람, 저렴한 음료, 넘치는 충전 코드, 깨끗한 화장실
간단한 즉석식품과 바깥의 휴게공간
그리고 친절한 서비스
일차 개인정비를 하고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오늘은 이곳에서 여정을 마치기로 한다
마을입구에 버스정류장이 있어
나가기 좋을 것 같고
나가기 좋은 곳이 다음에 들어오기도 좋을 것이기 때문
카페테리아 직원 분께 대중교통을 물어보자
사장님이 마침 읍내에 나갈 일이 있으시다며
서울 가는 고속버스가 있는
동송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주시겠다고 하신다
알고 보니 이분, 사장님이 아니라 양지리 이장님
카페테리아는 마을 수익사업으로
주중에는 무인카페로 운영하고
주말에는 손님이 많아 이장님 따님이 주방을 보고 있다고
이장님과 동송터미널까지 가는 차 안
재미있는 현지 이야기를 듣고
다음 번 출발 할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그렇게
첫번째 강원도 누리길
행운으로 시작해 행운으로 끝난다
철원, 평화의 빛
민간인 출입통제가 풀린지 얼마되지 않아서 일까
철원에서 만난 분들 모두
순박하고 친절하고 재미 있고
평화에 대한 염려와 열망이 컸다
일 년 사이 꺼져 버린 줄만 알았던 평화의 빛
사람들의 가슴 속에 아직 살아 있었다
철원의 빛, 평화의 빛
결코 꺼지지 않을 그 빛
어두웠던 내 마음 다시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