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순간들이 나였다

봄날의 기억을 켜켜이 모아서 『봄은 또 오고』

by 원더풀

며칠 전, 워킹맘을 위한 자기 돌봄 워크숍에서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성인이 된 스무 살부터 어느덧 마흔 살이 된 지금까지 중요한 사건을 변곡점으로 표시하고, 당시 나의 감정적 만족도를 점수로 매겨보았다.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 입학해서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자며 밴드 동아리, 해외 봉사활동, 호주 워킹 홀리데이 등 열정과 모험이 가득했던 22살의 나. 대학 졸업 후 NGO활동가로 일하며 프로젝트와 팀을 키우는 과정에 치열하게 몰입하고, 지금의 남편과 사랑에 빠져 활짝 핀 꽃 같았던 27살의 나. 일에 대한 회의감, 진로 고민, 회사에 대한 실망, 대학원 방황, 백수 생활부터 이직까지 정처 없이 길을 헤매던 29살의 나.


두 번째 회사로 이직해서 낯선 업무와 역할이 어려워 눈치껏 적응하고, 초보 엄마 딱지를 붙이며 새로운 책임감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배우던 30살의 나. 끝없는 삽질의 과정을 거쳐 조금씩 프로젝트를 일구고, 작은 성공 경험과 실패가 쌓여 일에 대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맛보기 시작한 33살의 나. 일과 육아라는 두 개의 배낭이 너무 버거워 번아웃을 이겨내기 위해 2개월간 재충전의 시간을 선택한 39살의 나.


하나씩 찍어 놓은 점을 선으로 이어보니 어떨 때는 완만하고 안정적으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골짜기를 거쳐서 다시 한번 정상의 풍경을 만끽하다가, 다시 계곡의 바위를 오르는 산의 모습이 그려졌다.


인생이란 어쩌면 산과 닮은 게 아닐까? 작은 오솔길에서 시작해 나비도 보고 이름 모를 풀도 만나고, 오르막에서는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포기하고 싶지만 노력한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로 받는다. 비탈길에서는 다리가 후달거리지만 조심조심 한 발을 내딛으며 그래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 말이다.


인생 그래프를 보고 나에게 중요했던 3가지 변곡점을 꼽아보았다. 당연히 감정 만족도가 높았던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을 꼽을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인생에서 가장 바닥을 친 순간을 2개나 선택했다. 당시에는 깊은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시기였는데, 다시 그 굴곡을 빠져나와 새로운 도전과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모습이 더 의미 있었다.




봄날의 기억을 켜켜이 모아서『봄은 또 오고』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경험하는 봄의 기억을 중첩시키면서 삶의 모습을 독특한 책의 형태로 표현한 그림책 『봄은 또 오고』. 이 책은 완전히 아날로그 지향적이다. 책의 귀퉁이나 중간 일부를 조각처럼 잘라내고 타공 된 구멍을 통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주인공의 삶에서 인상적이었던 기억과 추억을 켜켜이 쌓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첫 장을 넘기면, 표지에 있던 아기가 등장한다. 두 살 정도 된 아기가 평온하게 잠들어있다. “두 살 때까지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라는 짤막한 문장과 함께,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세 살의 봄, 주인공은 엄마 손을 잡고 모래사장 위에서 걸음마를 뗀다. “파도 거품 속 가지린 히 놓인 나의 두발, 내가 간직한 첫 기억이야”. 새하얗고 부드러운 모래, 철썩이며 나를 간지럽히는 파도, 두 손을 잡아주며 걸음마를 가르쳐주던 엄마까지 주인공은 이 순간을 파도 거품 속에서 단단하게 디뎠던 두 발로 추억한다.


네 살의 봄, 아빠가 도랑가에서 처음으로 산딸기를 맛보게 해 준다. 혀끝에 남은 새콤 달콤한 산딸기의 맛은 너무나 강렬해서 주인공의 인생에 오래도록 남는 기억이 된다.


아홉 살의 봄, 마음에 맞는 친구와 신나게 스케이트 보드를 타면서 논다. 열 살의 봄에 이사를 가게 되어 친구와 헤어지지만 친구와 함께했던 추억은 잊지 못한다.


그리고 스물셋의 봄, 우연히 길거리에서 아홉 살에 함께 놀았던 친구와 마주치게 되고 서로 쑥스럽게 인사를 나눈다.


그렇게 주인공인 매년 새로운 봄을 맞이하면서 어른이 된다. 꿈틀거리는 도마뱀이 뱀인 줄 알고 놀라서 도망가기도 하고, 첫사랑에 빠지고, 이별을 하고, 일을 시작한다. 혼자서 긴 여행을 가고, 삶의 동반자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주인공은 성장해 나간다.


별 것 아닌 일상 같지만, 주인공에게는 특별했던 소중한 기억이 쌓이고, 그러한 삶이 담백하면서도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 책을 보면서 나에게 소중한 기억들은 무엇이 있었을까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해맑았던 소녀의 나. 커다란 벽 앞에서 길을 헤매던 나. 조금씩 세상에 부딪히고 단단해지는 나까지. 모든 순간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조금 더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되겠지. 오늘의 순간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해 나가면서.



1cm 마음 성장 | 나만의 서사를 만들어본다면


심리학에서는 개인의 삶을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하는 과정을 '내러티브(Narrative)'라고 한다. 단순한 경험의 나열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의미가 담긴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봄은 또 오고』에서 타공 된 구멍 사이로 보이는 기억의 조각들은 단절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과거의 기억은 현재로 연결되어 나에게 또 다른 의미를 선물처럼 선사한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당신만의 서사입니다. 당신이 그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기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성과와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 『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송길영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굴곡진 서사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똑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기에, 각자의 독창적인 발자국을 통해 우리는 공감하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기 치열하게 노력한 과정, 그 당시에 느낀 감정과 시사점, 바닥을 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좋아한다.


삶에서 뿌듯함을 느끼며 얻은 성취와 그 과정에서의 좌절은 나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그 모든 경험과 기억이 쌓여 나만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이야기가 된다. 나의 도전, 열정, 실패, 실수들은 단순한 숫자나 타인의 평가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 과정은 오로지 나만의 진실하고 진지한 기록이며, 그 기록이 곧 나의 서사가 된다.


나의 서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할 수 있다. 새로운 경험과 관점이 추가되면서 과거를 재해석하게 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경험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해석하며 나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게 한다. 나를 정의하고, 내가 걸어온 길을 자주 들여다보자. 내가 만드는 서사야말로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방법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