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사랑하는 나의 『왼손에게』
“엄마의 새 출발을 응원해 주자~”
퇴사를 결정한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다가 남편이 아이들에게 건넨 한 마디였다. “왜? 엄마 일 그만둬?” 첫째가 깜짝 놀라며 묻는다.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 밥을 먹고 자라고, 방학 중에도 평상시처럼 돌봄 교실로 등교하는 게 익숙했던 첫째였기에, 엄마가 회사를 그만두는 게 꽤나 놀라운 소식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회사를 그만두는 거지, 일을 그만두는 건 아니야. 엄마는 이제 엄마의 일을 찾아가는 거야” 남편이 자상하게 아이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퇴사 후 어떤 커리어를 다시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과 두려움이 자꾸만 삐져나오는 것을 남편이 알아차린 걸까. 아이에게 해주는 말이 오히려 나를 위한 담백한 격려로 전해졌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준 것 같아 남편이 고마웠다.
연애 3년과 결혼 12년의 기간을 더해 나와 남편은 15년을 함께 했다. 같이 있기만 해도 설레고 애틋했던 시기를 거쳐, 일과 육아에 지쳐 짜증과 화를 주체 못 해 서로에게 모진 화살을 쏠 때도 있었다. 연애를 할 때 나는 이 사람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혼을 하고 한 집에서 부대끼며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30년 가까이 각자의 생활 패턴과 습관, 사고방식, 가치관의 줄기가 자라오다가, 두 개의 줄기가 엉키면서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만 부딪히며 갈등이 생겼다.
갈등의 어원은 칡을 뜻하는 갈과 등나무를 뜻하는 등이 합쳐진 단어이다. 칡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데, 홀로 서지 못하는 두 덩굴 식물이 만나 복잡하게 얽히는 모습을 ‘갈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찌 보면 부부 관계도 이 덩굴 식물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일상에서의 크고 작은 충돌을 슬기롭게 풀어나가면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 생활 초기에는 나와 남편도 맞벌이 부부의 현실과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서툴렀던 것 같다. 속상해서 한 말이 상처가 되기도 하고, 무심한 태도에 서운할 때도 있었다. 말다툼을 하고 홱 돌아서버릴 때에는 먼저 와주길 기다리다가도 내가 다시 다가가야 하는지 끙끙거리다 눈물로 잠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공유하는 삶의 시간 속에서 부모가 되는 기쁨을 함께 맛보고,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맥주 한잔으로 흘려보내고, 크고 작은 어려움을 서로의 손을 잡고 헤쳐나가며 우리의 관계는 점점 단단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눈빛만 봐도 통하는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
“정말 참을 만큼 참았어”라는 비장한 대사로 그림책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왼손에게』에서는 오른손과 왼손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장 가깝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화해하고 사랑하는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그림책이다.
오른손은 억울한 게 많았다. 숟가락질, 양치질, 가위질, 빗질까지 오른손이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였지만, 왼손은 핸드크림을 바를 때만 슬쩍 다가온다. 그리고 늘 반짝이는 반지며 시계, 팔찌는 늘 왼손 차지였다. 오른손, 왼손의 생김새며 움직임도 모두 같은데 왜 궂은일은 몽땅 오른손이 해야 하는지, 오른손은 억울하고 분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빨간 매니큐어가 등장한다. 오른손은 정말이지 설레는 마음으로 예뻐질 자신의 손을 기대하며 왼손에 정성스럽고 깔끔하게 매니큐어를 발라준다. 자, 이제는 왼손의 차례다. 왼손이 긴장한 듯 바들바들 떨며 매니큐어를 오른손에게 바르기 시작한다. 오른손처럼 잘 발라줘야 하는데.. 긴장되는 순간이다. 결과는? 다들 경험해 봤겠지만, 엉망진창이다. 빨간 매니큐어 칠이 손톱 밖으로 모두 삐져 나가고 뭉쳐버렸다.
오른손은 폭발한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매니큐어에서 시작한 싸움에서 평상시 쌓여있던 오른손의 감정이 순식간에 와장창 쏟아져 나온다. 왼손은 당황스럽다. 자기도 나름 열심히 한 건데 자신을 무시하는 오른손의 말에 화가 난다. 두 손의 싸움이 격해지면서 오른손이 다치고 만다. 왼손은 어떻게든 오른손의 역할을 대신해 보려 애쓰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오른손의 부재가 간절하게 느껴진다.
어느 날, 불청객 모기가 왼손의 손등을 물어 버리면서 왼손은 가려운 곳을 긁지도 못하고 고생하고 있다. 이때 오른손이 나타난다. 과연 오른손과 왼손은 서로 묵혀있던 감정을 잘 풀고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왼손에게』를 쓰고 그린 한지원 작가는 왼손과 오른손을 빗대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모든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늘 옆에 있지만, 가깝기에 쉽게 상처를 주고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수많은 관계들 말이다. 나는 오른손과 왼손의 이야기에서 부부의 관계가 보였다.
분가를 하고 친정 부모님이 해주시던 집안일, 육아가 오롯이 나에게 넘어왔다. 남편은 늘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들어왔다. 나는 아이의 아침 등원, 회사 생활, 퇴근 후 아이의 저녁 식사, 밀린 설거지, 빨래, 청소, 책 읽어주기, 씻기고 재우기 등을 모두 도맡아 해야 했다. 퇴근이 늦고, 회식 중이라 전화도 안 받는 남편이 야속했다. “애는 나만 키우냐!”, “나도 일하고 있다고!” 서러움에 북받쳐 소리를 지를 때도 있었다. 마치 책에 나온 오른손처럼 나는 억울했다.
하지만 남편도 상황이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이직 후 회사 생활에 적응하고 일에 몰두하는 시기였다. 그렇게 새벽같이 회사를 간 것도 직무에 대한 학습을 해야 했고, 저녁에 사람들을 만나야 엉켜버린 일의 매듭을 풀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했고,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잘 버는 것이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늘 말다툼으로 시작되어 끝나던 일상이 지쳐갈 즈음, 우리는 각자의 상황, 집안일과 육아에 대한 어려움, 쌓여있던 서운함과 기대하는 것들을 조금씩 대화로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 “미안해, 내가 조금 더 노력해 볼게”라는 말과 서로를 배려하는 행동으로 조금씩 우리 부부 사이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심리학자 존 가트만 교수는 3,600명의 커플을 39년간 연구한 결과, 성격 차이로 이혼을 하는 확률보다는 부부가 싸울 때 상대방을 경멸하거나 비난하는 태도를 보이는 대화 방식으로 인해 헤어질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어도 표현방식 즉,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말투, 말이 부정적이면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만 애 키우냐!”라는 말 대신 “여보, 저녁 먹고 아이 좀 씻겨줄 수 있을까?”라며 내가 원하는 일을 부드럽게 요청하고, “오늘도 늦게까지 고생했네”, “아까 아이 책 읽어줄 때 보기 좋더라, 고마워”라며 각자 힘들게 보낸 하루를 인정해 주고,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야 말로 슬기로운 부부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비법이었다.
<굿 파트너>라는 드라마 작가이자 이혼 전문 변호사는 ‘부부는 도대체 뭘까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부부는 가족이 되어버린 ‘남’이라고. ‘남’의 본질은 쭉 가지고 가는 것이기에 가족으로서의 울타리, 서로 애정과 신뢰는 유지하면서 타인으로서의 이해와 예의를 갖추는 것이 부부 관계를 잘 유지하는 핵심이라 전했다.
고마울 땐 고맙다고 말하고, 미안할 땐 미안하다고 말하기. 서로 수고했다고 등 다독여 주기. 눈 마주치며 이야기 들어주기. 이것만 기억해도 우리 부부 관계는 앞으로도 애틋하고 단단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