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땐 상처였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되는 묵직한 한마디.
바야흐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24살에 시작 된 나의 첫 사회 생활.
내 인생 최초의 사수는 나랑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빠른 년생이라 나보다 5개월 먼저 태어난 한 학년 위 언니였다. 입사는 나보다 한, 두 달 정도 빨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글동글한 얼굴을 가진 나(이하 '동글씨')는 누가 봐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 혹은 대학생으로 보였고, 목소리까지 하이톤이라 사람들이 제 나이보다 더 어리게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편, 사수(이하 '차분씨')는 이국적인 이목구비와 차분한 말투, 우리 또래가 입지 않을 법한 패션을 선호한 덕분인지 제 나이보다 10살+ 더 성숙해 보였다.
사수와 난 기자 미팅을 자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자: 아이고, 동글씨 몇살이에요? 대학은 졸업하고 회사 다니는거에요? 처음엔 고등학생이 들어오는 줄 알았네~
동글: 아..하하 감사합니다. 저 올해 24살이에요.
기자: 그렇구나~ 엄청 어려보이네요 하하. 차분씨는 아기는 있어요? 아직 없나..?
(속으로 매우 당황. 결혼도 안한 내 또래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내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차분씨는 매우 차분하게 대답했다.
차분: 아, 아직 결혼 안했어요. 천천히 하려구요~
기자: 그래요? 아~ 올해 몇살이죠?
차분: 저 28살이에요 ^^
(2차 당황.. 엥?? 차분 선배!! 무슨 소리예요!! 24살이잖아요!!!라고 마음 속으로만 외쳤다.)
기자: 아, 생각보단 나이가 많지 않았군요. 동글씨는 앞으로 차분씨한테 일 많이 배워요~^^
차분: 네, 입사한지 얼마 안된 친구라 앞으로 제가 잘 가르쳐야죠. ㅎㅎ
동글: 네.. 하하하....(한달 먼저 입사해 놓구서.. 참나)
이런 대화 속에서 파스타는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기억이 안난다.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미팅이 끝나고 회사로 복귀하는 택시 안에서, 사수는 내게 묵직한 한마디를 건넨다. 10년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그 묵직한 한마디를...
차분: 동글씨, 동안은 좋은 게 아니에요. 지금은 좋다고 하하 웃을지 몰라도 사회에서 동안이라는 말은 좋아할 일이 아니에요.
이 말에 난 멍- 때리다가 '아, 네..'라고 얼버무렸다.
그 날 저녁, 퇴근해서는 친구와 다른 동료들에게 차분씨의 한마디를 성대모사로 따라하며 정말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일이 아니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당시엔 '본인이 노안이라서 피해의식 있나? 그래, 너 노안이라 참 좋~겠다' 혹은 '앞으로도 미팅만 나가면 나보다 몇년 이상 선배인 척 엄청 해대겠네! 아 억울해..'라는 삐딱한 생각을 했지만 저 뒤로 나 나름대로 사회 생활을 이어가다 보니 차분씨가 했던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 것 같기도 했다.
일 하다 보면 일부 사람들은 내 겉모습을 보고 '완전 초짜 신입'이라 생각해서 나를 제쳐두고 회의하는 경우도 있었고, 지금 일한지 'n년차' 라고 말하면 화들짝 놀라며 그 때 부터 나에게 일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차분씨가 나에게 말했던 이유가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했던거겠지?
그 선배 때문에 아침마다 회사 출근 하는 게 무지무지 스트레스였고, 몇년 후 그녀가 퇴사하는 날이 하필 내 생일날이라 '와. 이건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내 앞에선 엄청 세고 강한척 했지만 사실 무지 여린 사람이라는 걸 난 알고 있었는데.
차분씨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아들 한 명 낳아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택시에서 나에게 했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차갑고 냉철했던 그 말 때문에 몇 년 간 내 맘속엔 그녀에 대한 응어리가 있었다. 하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니, 사실 표현이 투박했을 뿐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나를 위함이었을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 그 사수와 같은 회사를 다닐 수 있겠냐 물어본다면 당연히 'NO, THANK YOU!'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