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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land Aug 14. 2020

'딸'은 '나'다 = '다른 나'다

딸은나다 [따른나다] -> 다른 나다


1994년 8월, 충청도의 어느 한 아파트

내복 차림으로 코코블럭 나무모양 블럭을 들고 서 있는 7살 소녀. TV 앞에 서서 신나게 엄마에게 말을 건네며 놀고 있다. 


"안녕하세요. 리포터 OOO입니다. 오늘은 제가 축제 현장에 나와 있는데여~ 한 번 인터뷰를 해보겠습니다~ 오늘 기분이 어떠신가여???"


신난 표정으로 코코블럭을 엄마 입 쪽으로 건네며 엄마(축제 현장에 나와 있는 시민 역할)가 무슨 대답을 할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기다리는 꼬마. 


2020년 8월, 경기도의 어느 한 아파트

역시 내복 차림의 7살 소녀가 거실에서 엄마 아빠를 앞에 앉혀둔 채 TV 앞에 서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코코블럭 마이크가 아닌 '블루투스 마이크'라는 점. 그리고 다른 한 손엔 소녀가 아빠에게 부탁하여 얻어 낸, 프린터로 출력한 빼곡한 글씨가 담긴 종이 한 장.  


"오늘은 남쪽 지방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겠고요, 우산을 꼭 챙기셔야 할 거 같씀미다"


7살 소녀는, 엄마 아빠가 자신을 보지 않고 딴짓을 하는 걸 절대 용납 못한다.


"어허!! 모두 주목!"



1994년 어느 여름, 충청도의 어느 한 아파트

7살 소녀가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서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놀란 엄마가 무슨 일인지 묻자, 아이는 꺼이꺼이 울면서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간다.


"아랫집 언니네 집에 가서 같이 놀자고 했는데, 언니가 문 안 열어주고 문 꽝 닫아서 부딪혔어"


엄마는 속이 타들어 간다. 아랫집과는 친한 사이지만 이건 용납이 안된다. 딸의 눈 주위가 새까맣게 된 걸 보니 진정이 되질 않는다.


2020년 어느 여름, 경기도의 어느 한 아파트

7살 소녀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현관문 여는 소리를 듣고 나서, 잘 놀다 왔는지 마중을 나간다. 소녀는 엄마를 2초 정도 쳐다보기만 하다가, 갑자기 뻥~ 대성통곡을 한다. 엄마는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있잖아, 00이가 나랑만 안 놀고 ㅁㅁ이랑만 놀아. 그리구 00이가 나한테 뚱뚱하다고 그랬어"


울면서 말하느라 해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같이 놀던 친구가 딸에게 속상한 말을 했나 보다. 사실 딸이 00 때문에 운 적이 이번은 처음이 아니다. 엄마도 그동안 참았던 게 폭발해서 00 엄마에게 카톡을 보낸다.




위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나의 7살 때, 그리고 7살 우리 딸의 이야기다.


딸을 볼 때마다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외모적인 부분은 유전적인 요소이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물론 아빠를 더 많이 닮긴 했다) 내가 어렸을 적 하던 놀이나 행동, 말투, 표정을 지금의 딸이 그대로 하고 있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놀라운 걸 넘어서 경이롭다.


난 어렸을 적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동안 심심하면 가상의 인물이 내 옆에 있다 생각하고 혼자 인터뷰 놀이를 그렇게 했다. 그런데 요즘 우리 딸도 그런다. (결코 딸에게 나 어렸을 적 인터뷰 놀이를 즐겨했다는 말을 꺼내본 적도 없다)


어렸을 적 친구들이 나에게 모진 말을 하거나 넘어지는 등 창피하고 부끄러운 상황에 직면하면 난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울음을 참다가 결국엔 터져버렸다. 2020년의 우리 딸 역시 그 특유의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금세 울어버린다.


코코블럭을 건네면서 엄마가 무슨 대답을 할지 기다리던
그때의 내 모습이, 지금 내 딸의 모습이 되었다. 

코코블럭 마이크를 건네받고 딸의 인터뷰에
대답을 하던 그 때 그 엄마의 모습이, 지금 내 모습이 되었다.


'딸'은 '나'다. 즉, '다른 나'다.

우리 엄마에게도 나는 '당신의 다른 나'였을 거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가끔 남편이 아이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열 번 중 한 두 번, 아이가 울 때가 있다. 그럴 때 남편은 아이가 왜 우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난 딸이 왜 우는지 안다. 왜냐면 딸의 마음은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 딸은 또 하나의 나다. 


아이가 가끔 말을 안들을 때 참다 참다 폭발해서 딸에게 모진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아이가 내 말을 듣고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멈추질 못하는 때가 있다. 아이와 한 바탕하고 나면, 딸을 안고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우리 딸 미워서 그러는 거 아닌 거 알지? 엄마는 우리 딸 진짜 진짜 사랑해."


놀라운 건, 내가 어렸을 때 엄마한테 혼나고 들었던 말과 똑같다는 것.

울 엄마가 내 눈이 새까맣게 돼서 집에 왔을 때 아랫집에 화를 내던 것처럼, 나도 친구의 모진말에 울던 우리 딸이 너무 안타까워 화가 났던 것 처럼. 


딸이 다른 나로 살아가고 있듯이,

나 역시 여전히 울 엄마의 다른 나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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